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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신, 작법과 작가에 대하여 말하다

김탁환의 <대소설의 시대>

보통, 방송작가와 기자는 시니컬하다는 평가를 많이 받는다. 자기들이 아는 게 많아 잘난 척하고, 팔짱끼고 앉아 도대체 네가 얼마나 아는데, 새로운 것을 내놔 하고 듣는다는 것이다.


최근 독서 모임을 하나 시작했다. 한국 소설을 읽는다는 게 매력적이었다. 이번이 시즌3로 나는 처음 참여했고, 주제는 작가의 리즈시절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한국 작가들이 데뷔할 무렵, 정말 눈부시게 잘 쓸 때의 작품을 하나씩 골라 읽는다. 사실 요즘 한국 소설을 거의 안 읽었다. 소설을 떠나 내 책이나 방송을 위한 자료 이외에 어떤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핑계김에라도 책을 읽던 옛 시절이 그리울 정도다. 그러다 우연히 알게 된 모임이 소설을, 그것도 한국 작가의 소설만 읽는다니, 강제로라도 책을 읽자 싶어 참여한 것이었다. 덕분에 6월 한 달 동안 두 권의 소설을 읽었다. 그 중 하나가 김탁환의 <대소설의 시대>다.


18세기, 궁궐, 사대부, 세책방 등 소설을 좋아하여 읽고, 필사하고, 토론하고, 짓는 소설 애호가들이 중심이 되는 이야기다. 23년 동안 한 편의 이야기 199권의 책을 낸 작가임두, 조선 최고 이야기의 신은 궁의 후원을 받고 글을 써왔는데, 어찌 된 일인지 5개월째 200권을 쓰지 못한다. 이에 김진과 이명방이 해결을 위해 나선다.


전작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셜록과 왓슨의 콤비 추리소설 같은 형식임을 알겠다. 힘차게 치고 나가는 문장과 사건 구성이 좋다. 때로 문장이 읽히는 속도가 내용을 이해하는 속도보다 빠를 정도였다. 얼마나 치열한 자료조사와 고증을 했는가, 존경스럽다. 그의 소설을 처음 읽었고, 이것이 소설 백탑파 시리즈의 최신작이라는 것을 모르고 이것부터 읽었으나 소설을 읽고 즐기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물론 처음부터 읽었다면 이보다 더 재미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옛날 막장드라마의 기억상실증처럼 요즘 여기저기 치매가 하도 남발되어 소설가가 치매에 걸렸다는 설정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살인자가 기억상실에 걸린 것보다 소설가가 기억상실에 걸린 것이 더 아이러니겠지만 느낌으로는 그렇지 않다.


예전 아내가 점 하나 찍고 돌아온다고 못 알아보고 두 번 사랑에 빠진 막장 드라마를 남편이 치매에 걸려 변장한 아내를 못 알아보고 두 번 사랑에 빠진다고 설정한 최근 드라마에 경악한 직후 읽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조선시대 후기 한글소설이 어느 정도였을까 궁금해졌다.  우리나라는 한글을 가지고 제대로 놀아본 역사가 짧아서 아직은 실험기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재미있는 내가 좋아하는 우리나라 소설이 별로 없다고.  

 <대소설의 시대>를 읽고 보니 과연 18세기 조선의 한글소설은 어땠을까, 읽어보고 싶어졌다. 소설의 목차 제목이 모두 실존하는 대소설들의 제목이나 내가 읽어본 것이 하나도 없다. 부끄럽고 부끄럽다. 러시아가 18세기 문학적 성취를 혁명과 함께 잃었다가 최근 회복하고 있듯이 우리도 그때의 맥을 되살려야 하지 않을까.


얼마 전, 소설을 읽다가 당황스러웠다.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 뉴스나 방송에 소개된 이야기들이 2-3페이지에 걸쳐 연속적으로 등장하는 것을 보며, 소설을 이렇게 써도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나보고 방송작가라 아는 상식이 스포일러가 되어 이야기를 재미있게 즐기지 못하는 것 아니냐고도 했다.


그러나 김탁환의 <대소설의 시대>를 읽으며 소재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구성하고 이야기에 엮는 방식의 문제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인왕산에 5-6번 정도 올랐고, 그 중 인문산행과 마애 산행이 두 번 이상이었다. 때문에 <대소설의 시대>에 나오는 홍제동의 마애불(조선시대 지도에도 표기된 커다란 마애가 현재는 채석장이 되면서 사라졌고, 현대적인 마애가 초라하게 새겨져 있다.)과 석굴암은 물론 최근 발견된 금강굴까지 모두 가 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식상하거나 앞에 이야기한 경우처럼 취재해서 썼네가 아니라 오히려 더 흥미롭고 생생하게 소설을 읽었다. 소설가의 답사 경로가 어떨지 궁금했고, 따라 가보며 되새겨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훌륭한 작법서를 읽은 기분이기도 하다.


한편, 이야기의 신 임두의 입을 빌려 대소설에 대한 김탁환 본인의 다짐을 되새기는 것은 아닐까 싶다. 자신의 스물넷으로 되돌아가 “제 삶과 일치하는 문장만 적을 거예요”라고.


읽다가 중간에 멈추는 바람에 스포일당했던 스물넷 에피소드는 참 좋았다. 할머니가 손녀에게 쓰는 편지 형식의 "마음 가는 대로"(수산나 타마로)가 떠올랐다.


다행이다, 내가 한국 소설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 동안 재미있는 한국 소설을 제대로 못 만난 거였다!

그의 다른 소설들도 읽고 싶다.


*기억에 남는 문장들


“소설은 머리로 쓰는 것도 아니고, 손으로 쓰는 것도 아니다. 온몸과 온 마음을 매일매일 아낌없이 내던지는 고된 작업! 그렇게 내던지기 위해선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어야 한다. 특히 잘 먹어야 한다. 소설 쓸 시간 아낀다고 굶는 것보다 한심한 짓은 없다.”

1권 261쪽


“소설가란 결국 쓰고 쓰고 쓰는 사람이다.

아무리 쓰더라도 쓰고 싶은 것이 남아 있는 사람이다.”

2권 2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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