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전 우리 회사를 다니기 시작할 때 영어를 정말 50% 이해했으려나? 긴 영어문장에서 제일 뒤에 나오는 단어 간신히 알아듣고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오케이!"만 할 수 있었다. 이해가 안돼서 내가 알아듣을 것에 대해 다시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런 상황을 역으로 말하려면 영어를 "Do you.. 혹은 Did you"를 시작으로 문장을 머릿속에서 만들어서 다시 내뱉어야 하는데 이 과정이 너무 길었다.
내 머릿속에 정리되어 말하다가 단어를 빠뜨리기도 하고. 암튼 미국회사에서 일하는 것 중 제일 어려운 게 바로 [영어=언어소통]이었다.
그래도 내가 기죽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주특기를 갖고 있어서 였다. 바로 어렸을 때 남미 아르헨티나에서 14년을 살고 온 거라 스페인어는 제2 외국어로 자신 있었다.
10대중반에 이민을 가서 학교 친구들과 막 대화하며 배운 거라 머릿속에 따로 나열하지 않아도 하고 싶은 말이 툭툭 나온다.
그래서 미국 동료가 나한테 지시한 사항을 잘 이해가 안 됐을 때 스페니쉬 잘하는 샘플사들에게 물어 물어 해결할 수 있었다.
그 직장에 20년 넘게 일해온 샘플 메이커들이 많았다. 멕시코와 과테말라 혹은 엘살바도르에서 온 남미 사람들이었는데 새로 온 한국아줌마(=나)가 스페니쉬를 줄줄이 해대니까 그들도 너무 반가워했다.
"Donde Aprendiste Español?" =스페인어 어디서 배웠어요?
"En la Argentina. Decime como se hace estos en aqui?, Asi le gusta como se queda?"=아르헨티나에서 배웠네요, 이 회사에서는 이런방식으로 하는게 맞는지요?
이렇게 하면 돼? 저렇게 하면 돼? 그런 뜻의 스페니쉬로 물어보면 미국인들도 쟤네들이 무슨 말 하나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설마 비비안이 자기가 한 말을 못 알아들어서 쟤네들이랑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꿈에도 생각 못할 것이다.
나의 별명은 "스페니쉬 하는 한국 애=La Coreana que habla Español"가 되었다.
암튼 그렇게 한 1-2년을 버티다 보니 어느덧 귀가 열리고 내 입도 터지고.. 이제는 그들과의 대화가 100% 소통이 가능하게 됐다! 미국에서 태어난 우리 아이들에게 한번 영어로 말해보았더니
"오, 엄마 영어 발음 좋아졌는데!" 라며 칭찬해 주었다. 미국 태생이 인정해 주니 더 자신감이 생겼다.
내가 이 회사에 적응하는데 큰 도움을 준 사람은 다름 아닌 디자인 디렉터인 앤드류이다.
그의 생일이 되면 나는 내가 사줄 수 있는 제일 비싼 와인과 향초를 선물한다.
혼자 사는 비혼주의자인 앤드류는 강아지 둘을 키우며 주말에는 아침부터 하이킹을 하고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는 와인 마시며 넷플릭스 보는 재미로 사는 능력 많은 아트 디자이너이다.
우리 회사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우리를 거의 먹여 살리는 엄빠 그 자체. 지금 50대 중반인데 이 회사에서 거의 30년의 시간을 바쳤다고 한다. 그동안 그의 머리는 흰색으로 변해가고 얼굴도 주름이 하나둘.. 하지만 그의 열정은 계속 keep going 한다.
내가 그에게 인정을 받아서 다행히 이 회사에서 일할 수 있는 것이었다.
여성용 뿐만 아니라 남성용 의류를 다 총괄하는 Design Director.
그의 아이디어는 정말 무궁무진하다.
절대 어떤 옷도 카피하지 않고 그 만의 스타일로 만들어서 스케치를 주는데.. 주말을 지나 월요일에 만날 때마다 한뭉큼을 준다.
그래서 "웬 디자인이 이렇게나 많이?" 라고 하면 와인 마시면서 inspire 됐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무슨 때가 되면 그에게 맛나다는 와인을 선물한다.더 영감을 많이 받으라고~
그리도 또 감사해야 할 분은 한국인이시며 우리 회사 사장님 바로 아래 임원이신 부사장님 Kwila.
한국이름으로 '길라'이신 건지.. 이메일 이름에 그렇게 적혀있다. 거의 60살이 넘으신 분인데.. 그 옛날 10대에 미국을 이민오 신거라 영어가 아주 퍼펙트하다.
눈매가 무서운 게 보통사람은 아닌 듯 인상이 세다. 그래서 나는 처음 몇 년 동안 같은 한국인이었지만 (우리 회사에 한국사람은 그분이랑 나 그리고 한 명 더 있다) 감히 한국말로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었다. 언제나 지나가면서 소극적으로 "하이!"라고 인사만 드렸다.
그런 분이 나를 뒤에서 조용히 응원하고 내가 작은 사고라도 쳤을 때 혼내지 않으시고 다 커버해 주셨다.
나는 처음에 그런 것조차 알 수 없었다. 너무나 완강해 보이고 회사의 굵직한 일들을 담당하시고 있기에 설마 나를?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를 더 대놓고 인정해 주시고 그분 덕분에 내 연봉도 팍팍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