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이다. 그 당시 한국 상황으로 돌아가자면 등장인물은 이민을 떠나려 하고 있고, '함께 못 가서 정말 미안해요.'라는 주인공은 이별을 선언하는 중이다.
2001년도 여름에 미국에 도착하고 두어 달 있다 바로 그 911 테러 사건(2001년 9월 11일,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조직인 알카에다가 일으킨 하이재킹 및 자살 테러 사건이다)이 났었다.
더 이상 미국이란 나라는 안전하지 않아 보였다. 특히 뉴욕이나 엘에이 같은 대도시는 더더욱.
다른 주로 이사를 가야 하나 잠깐 고민해 보았지만 우리처럼 스페니쉬 만 알고 영어는 까마귀, 그리고 학위를 받아서 미국에 정착하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이민자들에게는 엘에이가 편했다.
어딜 가나 스페니쉬 가 통했고 공공기관이나 심지어 아이들 유치원을 알아보는데도 학부모 중에 라틴계열 사람들이 있어서 접근하기 쉬웠다.
아마 그래서 영어가 늘지 않았을 수도..
하지만 에데데 영어로 좀 말을 시도하다 거기서 "eh? What?"이라는 반응이 보이면 나는 즉각 방패를 펼치듯
"Habla español? 스페인어 할 수 있어요?"라고 말을 꺼냈다.
미국은 많은 인종들이 모여 만든 나라라서 영어를 못하는 것이 크게 흠이 되지 않았다. 특히 중남미 사람들이 많이 이민 와서 사는 LA는 거의 스페인어 사용자가 영어보다 더 많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미국에 정착하기가 참 수월했다.
거의 30살이 다 돼서 미국으로 재 이민을 온 거라 예전 10대에 아르헨티나로 처음 이만 갔을 때보다 언어 습득이 현저히 어려웠지만 이가 없으면 잇몸이 있다고 여기저기 잘 소통하고 다녔다.
미국생활에 제일 먼저 필요한 건 운전면허였다. LA는 차가 없으면 발이 묶이는 것이다. 아르헨티나에서는 90년도 말에 수동으로 운전을 배워야 해서 결혼 전 학원을 다니다 면허증은 못 받고 이민을 오게 됐다. 미국에서는 오토차량으로 운전해서 면허증 따는 게 가능하다고 했다. 그때 10시간 개인교습받는 게 가격이 꽤 비쌌으나 남편에게 한두 번 배우다 이혼할 위기를 겪고 나서는 그냥 돈을 투자하는 게 서로에게 좋겠다고 결정을 했다.
생면부지 아저씨와 함께 같은 차 안에서 2시간 동안 운전을 배워야 하는 거라 이왕이면 좀 순수한 분이 낫겠다 싶어서 광고 난을 뒤져보니 "할렐루야 운전학원"이 있길래 바로 연락했다.
50대 중반의 아저씨가 집으로 날 찾아와서 그분 차를 타고 바로 동네를 운전하면서 배우는 방식이었는데 차에 태우더니 연습 전신실하게 기도를 해주었다.
"자매님이 오늘도 안전운전을 습득하고 꼭 운전에 자신감을 갖게 되기를.. 아멘~"
매번 그렇게 기도하고 운전연습을 시작하니 좀 마음이 편해졌다. 2,3번 동네를 그렇게 운전하고 마지막 2번은 DMV(운전면허 시험장) 근처를 마치 시험 보는 것처럼 코스대로 운전하였다. 미국은 한국처럼 운전면허 시험장안에 운전하는 게 아니라 동네마다 그 시험관이 가라는 데로 길가를 운전하면 된다.
시험 보기 마지막날 그분이(나중에 어느 교회 장로님이라고 소개했다) 운전면허 시험장 근처에 있는 Brand Park(글렌데일시의 유명한 공원)에 운전해서 도착하고는 또 기도해 주셨다.
"자매님이 내일 시험에 꼭 붙어서 아이들을 이 공원에 데리고 와서 즐겁게 뛰어놀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그 기도대로 나는 다음날 한 번에 운전면허에 합격하고 남편이 타던 2001년도 캠리에 아이들을 태워서 글렌데일 동네에 있는 공원들을 섭렵할 수 있었다.
학원이름 그대로 할렐루야다! 연습 2달 만에 운전 성공!
운전이 가능해지고는 바로 의류 패턴을 배울 학원에 등록했다. 미국 엘에이에 거주하는 한국분들은 다운타운의 속칭 ‘자바시장’으로 불리는 LA 패션 디스트릭에서 많이 일하는 데 2000년도 초반은 패턴사들의 공급과 수요가 참 많이 필요한 시기여서 학원 광고도 많았다.
어리바리한 나는 '패턴 6개월 완성'이라는 광고에 현옥 되어 그 사기성에 넘어가 6개월을 허비한 적도 있었다. 손으로 일일이 패턴을 그리고 만드는 게 6개월 배워서는 어림도 없었다. 나는 그 6개월 동안 그저 종이 자르고 가위질만 배운 느낌이다. 그래도 마침 다른 더 유명한 패턴학원에 중간 학기에 투입할 수 있어서 어찌 보면 그 6개월을 다 버린 건 아니었다. 내가 중간부터 그 새 패턴학원에 조인했지만 다른 새내기 학생들보다 월등히 선생의 가르침에 이해하고 바로바로 그려낼 수 있었다. 패턴학원 원장님이었던 폴김 선생님의 애 제자가 되어 1년 코스 끝날 때 즈음 선생님이 나를 제일 먼저 취직시켜 주셨다.
우리 아들 2살이 됐을 시기 나는 첫 주급을 받았다. 미국은 주급생활이라 처음엔 적은 돈이 들어오는 거 같지만 한 푼 두 푼 모으다 보니 내가 3년 동안 십만 불을 모으게 되었다! 그 당시는 남편이 외벌이 하다 나도 뒤늦게 생활 전선에 들어갔지만 한동안은 남편이 버는 돈으로 먹고살고 내가 번 돈은 꼬박꼬박 다 모으게 되었다. 이 새집으로 오기 전에는 정말 돈 모으는 재미가 솔솔 했는데.. 거의 백만 불이 다 돼 가는 큰집으로 이사오니 예전처럼 적금을 들 수도 없었고, 주급 3번을 받은 건 고스란히 집 대출받은 모기지 갚느라 우리는 항상 허덕이게 되었다. 그 당시는 좀 가랑이 찢어지는 짓을 한지도..
한국의 교육열이 높은 건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여기 미국도 만만치 않았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학군 좋은 곳을 알아봐야 했다. 학군 좋은 곳은 집이 후져도 당연히 집값이 비쌌다. 우리는 시부모님까지 6 식구라 방이 4개는 있어야 해서 새 집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거기다가 어머님은 평생 살아보지 못한 마당이 있는 집을 선호하셔서 내 종잣돈과 우리가 전에 살던 방 2개짜리 콘도를 팔아 넓고 학군 좋은 집을 찾아보니 백만 불 가지고는 살 수가 없었다(미국은 20%-40% 돈을 지불하고 나머지는 대출받으며 살 수 있었다) 매주말마다 집을 보러 다녔지만 100% 맘에 드는 건 없었다. 학군이 좋으면 집이 비싸거나 상태가 안 좋았고, 집이 맘에 들면 학군이나 다른 것에 제재가 있었다.
어찌해야 할까? 그 당시 아이들이 7살, 5살이라 우선은 그럼 학군은 좀 중간급이지만 넓은 집으로 선택했다.
아이들이 중학생 때 돈 더 모아서 학군 좋은 데로 이사 가면 되겠다 싶었는데.. 결국 그때 이 집을 사서 17년째 살고 있다.
그리고 학군에 밀려가지않고 중간급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이 공부를 잘해 A를 받으니 대학교 원서 넣을 때 오히려 유리했다. 대학교마다 학교점수보다는 내신 점수를 더 보는 거라 아이성적을 잘 유지해 놓으니 학군 좋은 곳에서 B 받는 애들보다 대학교를 잘 갈 수 있었다.
아이들이 점점 크면서 어느덧 미국생활에 점점 익숙해지는 나를 바라보게 되었다.
친구하나 없고 의지할 데 없던 이 낯선 도시는 이제 우리 2세 자녀에게는 고향이 되었다.
그리고 삶의 터전에서 싸우고 이긴 전쟁터 이자, 입맛도 이곳 미국음식에 더 스며들어 한국음식도 엘에이 스타일로 만들어서 스리라차소스 (타바스코 소스와 더불어 미국의 대표적인 핫소스이자 칠리소스. 이름의 유래는 태국의 시라차시)를 뿌려서 먹는다.
운전이 익숙해진 나는 주말이 되면 아이들과 여기저기 마구 다녔다.
친정식구가 미국에 아무도 없었기에 나는 주위에 좀 편안한 분이다 싶으면 "언니, 언니~"하며 친근하게 다가갔고 마침 아이들 나이도 또래이면 더 잘 어울려서 아이들에게 친구들을 많이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친구 엄마들이랑 친해지고 아이들을 같이 배우게 하기 위해서 '발레, 한국무용, 뮤지컬, 보이스카웃, 앙상블' 등을 같이 하며 아이들도 여러 액티비티를 배우고 엄마들끼리도 끈끈해지는 방법으로 만남을 이어갔다.
이제는 나보다 나이가 있는 분들이 더 편해진다. 언니, 집사님, 권사님 하며 존대하면 다들 동생처럼 잘해주셔서 나는 이제 이 LA에 친정식구 버금가는 이모, 언니, 고모, 오빠등이 많아졌다. 어찌 보면 내 성격이 많이 E로 바뀐듯하다! 새로운 도시에 적응하려니 I성향에서 E로 바뀌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