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lueVada Oct 04. 2024

나는 꼬레아나, 코리안

점점 자랑스러운 나의 정체성

남미 아르헨티나에서 제일 황금 같은 10대와 20대를 보냈다.

나의 학창 시절, 제2의 외국에서 생존하는 법, 썸 탔던 남자들, 평생의 자산 같은 10대 친구들을 다 마주쳤던 시절.

50대가 되어 지난 시간들을 추억해보니 이렇게 글로 남길 수 있어 다행이다라는 생각도 든다.

낯선 외국땅에서 우리가 한국사람이라는 게 어딜 가나 어색했다. 현지인들은 그저 우리를 China(중국인), 아니면 Japonesa(일본인)으로 물어보기 일쑤였다.

"Yo soy Coreana!(나는 한국사람이에요)"를 얼마나 외쳤던지. 그들의 눈에는 다 똑같아 보였고 다시 나를 만나도 긴가민가 헷갈려했다.

"Eres Coreana o China?(당신은 한국인이에요 아님 중국인)"

관두자~ 우리 눈에도 백인들은 죄다 미국사람이고 흑인은 다 아프리카 사람(알고 보니 중남미에도 흑인들의 나라가 있었다)으로 보이는 것처럼 제각각으로 나눠서 알아차릴 수 없겠지.

그 당시 한국이라는 나라는 별로 인지도가 없었고 아시아 국가 중에 중국과 일본에 가려진 제3 국의 이미지를 떨쳐낼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 동포들은 누구보다 더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고 그래서 돈을 좀 벌면 좋은 차, 좋은 집으로 자기들을 과시하고 싶어 했다.

내가 아르헨티나에 살 때는 버스도 곧잘 타고 다니고 지하철도 노선에 맞춰 타고 회사를 다녔었다. 하지만 작년 가을 오랜만에 아르헨티나를 방문했더니  20여 년의 시간 동안 대다수의 한국교민들은 성장하고 부유해져서 버스, 지하철을 안 탄다고 한다. 게다가 버스역에 날치기도 있다는 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우버택시를 타고 다녔다. 다행히 환율차이가 커서 부담 없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살 때는 그 나라 음식이 다 서양음식인 줄 알고 귀한 줄 몰랐었다.

거의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이민온 자들이라 음식문화가 고급스럽다.

여기 미국인들은 정말 음식 하는데 게으른 편이지만 (유명한 미국음식으로는 그저 치즈버거와 멕시칸음식인 타코인 듯)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집집마다 얼마나 맛있는 음식 냄새가 나는지 모른다.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엠빠나다(만두모양의 파이), 토스트 샌드위치(얇은 토스트인데 알맞게 오븐에 구웠다), 둘세 데 레체(캐러멜 잼)가 발라진 여러 가지 페스트리, 카페  레체(라테)부터 시작해서 온 가족이 즐기는 아사도(생갈비구이), 밀라네사 나 뽈리따나(소고기가스 위에 피자처럼 토마토소스와 치즈가 토핑 올려진 음식), 초리 빤(프렌츠빵에 넣은 핫도그 일종인데 그 안에 들어있는 소시지맛이 일품이다)과 맛있는 아이스크림등.

음식맛이 정말 다양하고 어느 동네 식당을 가도 다 맛있다. 미국으로 이민 와서 아르헨티나의 그 맛을 잊을 수 없어 많이 그리워했었다. 미국에서도 재료들은 구할 수 있었지만 그 독특한 손맛과 소스맛은 찾을 수 없었다.

글을 쓰다 보니 정말 군침이 한가득 도는 기분이다. 우리가  각자 고향의 음식을 그리워하듯 나도 아르헨티나 음식을 내 2의 고향이라 그런지 평생 그리워하며 살듯하다.


남미 아르헨티나에는 교포들이 거의 90% 이상 의류판매에 매진했다. 나도 식구들의 비즈니스라 좀 거들었었는데 너무 재미없었다.

나는 비즈니스 마인드가 없는지 손님이 들어와서 뭘 달라고 찾아도 그리 팔고 싶은 의욕이 없었다. 그저 책 읽고 글 쓰는 게 제일 재미있었다. 그래서 대학교 1학년때 한국인 교포들 상대로 편집되는 '한국일보'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부끄러움이 많은 나였지만 어쩐 일인지 "편집부 기자"를 찾는데 무작정 사무실을 찾아 보았다.

아무 경력도 없고 단지 그 당시 실장님에게 어필했던 건 "저희는 한국일보 독자입니다" 라면서 들이댔다. 내 확고한 의지와 성실한? 인상에 넘어가신 실장님은 바로 출근하라 했고 그분의 큰아들이 담당하고 있는 번역부에 나를 채용했다.

타이틀이 신문자였지 거의 가족중심의 비즈니스였다. 말발 좋고 의욕 넘치시는 와이프분이 모든 행정을 이끄시는 실장님이었고, 이름만 올려둔 사장님은 가끔 오셔서 한국에서 보내준 신문과 잡지등을 읽다가 가셨고 우리에게 빙그레 인사만 하셨다.

큰아들이 엄마와 함께 전반적인 일을 이끌어 갔으며 아르헨티나의 현지 신문들을 훑어보고 번역해서 남미 한국일보에 싣는 일을 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이 인쇄 쪽에서 일했던 것 같다. 할머니까지 동원돼서 우리에게 아주 맛있는 점심을 제공해 주셨다. 나는 오전에는 대학교 수업을 갔다가 1시쯤 신문사에 도착해서 일을 했었는데 도착하면 할머니가 내 점심밥을 꼭 챙겨 놓으셨다. 가끔 김치찌개에 빨랫줄 조각이나머리카락 등 눈이 어두운 할머니의 행적이 나왔지만 우리는 그저 감사함으로 얼른 빼내고 먹었다.

내 번역실력이 많이 모자랐지만 실장님의 도움으로(지금 생각해 보니 나를 잘 봐주신 듯) 잘리지 않고 편집부 일도 도우며 대학생활 때 용돈도 벌고 한국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실장님이 나를 많이 훈련 시켰었는데 눈치가 0였던 그 당시 나는 "선경아.. 그거 가져와라"라는 말이 제일 무서웠다. 그거가 무엇일까?

근데 같이 편집부에서 일하는 승주언니는 바로 알아차리고 갖다 드렸다. 저 언니는 어찌 저렇게 잘 알까, 언니가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온 거라 틀린가 보다.

나보다 4살 정도 많았던 승주언니는 아르헨티나에서 석사를 준비하고 있었고 저녁반이라 3,4시에 학교를 가는 스케줄이었다. 그래서 언니가 내 옆에 있을 때는 언니 찬스로 그거! 하면 챙길 수 있었는데 언니가 학교를 간 후 나 혼자 오로지 실장님을 담당해야 했다. 그날의 기사들이 다 type 돼서 쭉 A4용지에 찍어 나오면 나는 그걸 길게 잘라서 신문종이에 원판으로 편집을 하는 것이다. 그래도 실장님이 제일 먼저 탑 기사를 편집해 주시고 나는 자잘한 기사들을 땡빵하는 일을 했다. 근데 종종 빈자리가 커서 한국에서 보내준 잡지를 찾아보고 알맞은 사진이나 기사를 오려 넣어야 했다.. 그럴 때면 실장님은 그거 가져와라! 했던 것이다. 내가 그 신문사에서 3년을 일했는데 한 2년이 지나고 나니 나도 그것! 을 알아차리는 경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신문사에서 일할 때 내 첫 연애도 시작 됐었다. 같은 대학에서 만난 CC였는데 이 친구는 대만사람이었다. 최수종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친절하고 내 말에는 무조건 예스하며 어디든 데리러 달려와 준 흑기사 같았다. 나를 참 예뻐해 주고 좋아해 줘서 나의 자존감이 많이 우월해지게 만든 그. 하지만 우리는 둘이 스페니쉬로 대화를 나눴고 각자의 문화에 대해 너무 다른 게 많아서 많이 부딛혔다. 어찌 보면 대화에는 한계가 있었고 대만인이지만 뼛속까지 중국인의 자부심이 있어 보여 한국인은 형제의 나라라며 동생처럼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그 친구는 나보다 2살이 많이 졸업과 동시에 나와 결혼할 것을 계획했었는데 나보고 중국어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다른 언어를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그 친구네 템플에서 하는 수업을 들었었는데 너무 어려웠다. 그리고 나보고 결혼하면 시부모님과 같이 한 집에 살아야 하며 그들이 믿는 도교에 들어가야 하고 신부수업인 꽃꽂이나 요리를 배우러 다니란다.

만약 그가 한국사람이었다면 나는 곧바로 수긍하고 팔자를 바꾸려 결혼준비를 위해 이것저것 다 배우러 다녔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점점 내 정체성을 잃어가는 것 같아서 자존심이 상했다.

특히나 내 입맛에는 중국음식이 안 맞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바로 굴소스, 춘장인 듯한데 나는 음식마다 나는 특유의 춘장냄새가 싫었다.

그 집에서는 20대 중반 밖에 안된 아들을 장가 보내려고 신이 나 있었지만 나는 점점 뒤처지고 그와 연애만 하던 시절이 더 그리웠다.

그래서 결단하고 이별을 고했다.

'네가 중국사람이라서가 아닌데.. 나는 아직 결혼 준비가 안 됐다. 나보다 더 집안을 잘 이끌고 너를 서포트할 여자를 찾아봐'.

A형이었던 그는 자살소동까지 하면서 이별을 받아 들이지 못했었다. 그의 부모님이 나를 찾아오시고 돌아선 마음을 달래보려 '원하면 우리가 따로 살겠다' 하면서 붙잡았지만 내 마음은 풀리지 않았고 그렇게 봄에 헤어졌다.

하지만 같은 해 가을에 그의 결혼식 소식을 듣고 정말 놀랬다. 그의 할아버지가 결혼하면 재산을 물려준다고 하더니 정말이었나 보네. 근데 숨겨둔 아가씨라고 있었던 게야?

알고 보니 같은 대학을 다니던 대만 여자라고 한다. 우리 둘이 CC로 좀 유명했었는데 내 전 남자친구를 짝사랑하다 나랑 헤어진 것을 알고 다가갔다가 완전 넝쿨 채 굴러 들어왔다고~

아무튼 그 둘이 잘 살기를 기원했다.


약간 모범생 같았던 대만 남자와 헤어지고 나니 그다음은 더 자유롭고 싶었다. 마침 그를 통해 알게 된 내 룸메이트 친구(그 당시 내 전 남자 친구의 학교 동창의 여자 친구이었다)를 만나 우리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자주 둘이 어울려서 노래방도 가고 부킹도 받고 그래봤다. 마침 룸메도 나랑 비슷한 시기에 남자 친구를 뻥 차버려서 우리는 너무 홀가분하게 날아다닐 수 있었다. 나보다 훨 매력이 넘치는 룸메 덕분에 어딜 가나 부킹이 이어졌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나는 종종 그 룸메이트 친구랑 연락하며 지낸다. 우리 둘은 이제 다 아이들 대학 다 보내놓고 제2의 삶을 살려고 노력 중에 있다. 가끔씩 예전 추억을 더듬으며 깔깔댈 수 있음에 다 감사하다. 역시 노는 건 다 한때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