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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우미 Oct 09. 2022

소설 고라니18

노루의 메일

  선배님 지난번에 전화 주셨을 때는 제가 제대로 이야기를 하지 못했어요. 죄송해요.

  아마 눈치채셨겠지만 저 회사와 관련된 건 싹 다 정리했어요. 그곳에서 일했던 것, 생활했던 것, 제가 겪은 여러 사건들 그리고 사람들 모두 다요. 다시는 돌아보지도 않을 거예요.

  이런 제가 너무 갑작스럽다고 느끼실 수도 있어요. 사실 저도 사회라는 건 누구에게나 힘든 거니까 그냥 그렇게 살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살아가는 게 인생이겠거니 하고요. 그리고 그 외에 다른 방법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적응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런데 지난달에 동생이 갑자기 제 곁을 떠나갔어요. 동생이 그동안 몸이 아프기도 했지만 그래도 병원 다니고 약 먹으면서 큰 이상은 없었어요. 치료받으면서 앞으로 계속 좋아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회사에서 야근하고 집에 늦게 들어간 날이었어요. 집안에 들어서서도 저는 평소와 다른 점은 전혀 못 느꼈어요. 거실에도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요. 그래서 저는 여느 때처럼 제 방으로 들어가서 옷 먼저 갈아입으려고 했는데 가면서 보니까 동생 방에 문이 조금 열려 있더라고요. 방에도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는데 조용했어요. 저는 동생이 자고 있나 싶어서 천천히 문을 열고 동생 방으로 들어갔어요. 동생은 침대 위에 누워 있었어요. 깊이 잠들어 있는 것 같아서 불을 끄고 나오려고 했는데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좀 이상해서 가까이 다가가서 봤더니 동생이 숨을 쉬지 않고 있었어요. 119에 신고하고 바로 응급실로 옮겨서 온갖 처치를 다 했지만 동생은 결국 허망하게 떠나 버렸어요. 외상도 전혀 없고 이상한 점도 하나도 없었어요. 경찰이 부검을 하겠느냐고 물었는데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마당에 그런 게 뭐가 필요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렇게 혼자 남게 된 저는 제 인생을 다시 돌아보게 됐어요. 죽음이란 것에 대해서, 삶이란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어요. 그랬더니 모든 게 의미가 없고 허무해지더라고요. 언제든 갑자기 허망하게 죽어 버릴 수도 있는데 내가 지금 잘살고 있는 건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동생 몫까지 남은 인생을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야 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퇴직을 결심했어요.

  저 이제 조각 공부를 다시 시작할 거예요. 그래서 세계 조각의 성지인 피에트라산타로 가려고 해요.

  예전에 선배님이 기회의 여신 이야기를 해 주셨지요. 앞머리는 무성하지만 뒤통수는 대머리인 여신 말이에요. 저는 그 기회의 여신을 여기서 기다리지 않기로 했어요. 이제 제가 직접 찾아가려고 합니다. 이번 주 일요일에 이탈리아로 출발할 거예요. 사실 준비된 건 비행기 티켓뿐이에요. 그렇지만 그걸로 충분합니다. 지금 제 심장에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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