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우미 Oct 09. 2022

소설 고라니17

다시 고라니

  1년이 지났다. 나는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아예 돌아오지 않을 생각으로 휴직을 선택했다. 그런데 현실적인 어려움, 경제적인 문제로 나는 복귀하기로 했다. 알고 있다. 비겁한 결정이다. 나는 새로운 변화에 대한 스트레스를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손쉬운 길을 선택한 것이다.

  회사에 복귀한 후 나는 생각보다 잘 적응하는 것 같았다. 복직한 지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나는 노루의 퇴사 소식을 들었다. 최근 남동생의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 휴가를 내서 지금은 출근하지 않는 상태였다. 그런데 회사에 퇴직 의사를 밝혔다는 것이다. 절차는 바로 진행될 거라고 들었다. 나는 충격에 휩싸였다. 남동생의 죽음도 예기치 못한 일일뿐더러 노루의 퇴사라니. 도대체 그동안 노루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나는 오전 내내 고민했다. 노루는 분명 슬픔과 상실감에 괴로워하고 있을 것이다. 노루는 왜 내게 연락을 하지 않았던 걸까?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전화를 해볼까? 그런데 내가 전화하면 이곳에서의 힘든 기억을 되살리게 되는 건 아닐까?

  나는 긴 망설임 끝에 핸드폰을 들었다. 허공을 치고 되돌아오는 벨소리가 길어진다. 내 전화를 일부러 안 받는 건가? 그럴 수도 있지. 이대로 끊을까도 생각했다. 그때였다.

  “여보세요”

  “노루 씨, 나 고라니예요. 오랜만이에요.”

  “아, 선배님 안녕하세요. 그런데 선배님 전화번호가……”

  차분한 목소리였다. 아니, 차분함을 가장한 목소리라는 것을 나는 이미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통화를 빨리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잘 지냈어요? 노루 씨 얘기 들었어요. 얼굴 한번 볼까요, 노루 씨 괜찮으면.”

  “네, 저는 이제 남는 게 시간이니까 괜찮아요. 그런데 나중에 제가 다시 연락드려도 될까요?”

  “그래요. 노루 씨 편할 때 연락해요.”

  노루와의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나는 기대를 버렸다. 노루는 내게 다시는 연락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런 생각으로 회사와 관계된 사람들의 연락처를 모두 삭제했겠지. 그러니 내 전화번호가 등록되어 있지 않았던 거겠지. 충분히 이해한다. 나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회사는 이제 내게 별 의미가 없다. 매달 받는 월급으로 생활을 꾸려 간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딱 그 정도의 수단일 뿐이다. 재미가 없다. 출근하는 것도 식당에서 밥 먹는 것도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에도 흥미를 잃었다. 그래도 업무는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이 일이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점차 내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날도 그렇게 모니터를 쳐다보면서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책상 위 마우스 옆에 놓여 있던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나는 별생각 없이 핸드폰을 들고 화면을 확인하다가 갑자기 두 손에 힘을 주어 핸드폰을 움켜쥐었다. 노루가 보낸 메일이었다. 나는 한참 동안 휴대폰 화면을 노려보다가 창밖을 보았다. 눈부시게 반짝반짝 빛나는 소울강은 여전히 제 갈 길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 물결의 움직임을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갑자기 마음이 바빠졌다. 나는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업무용 책과 보고서들은 모두 쓰레기통에 버렸다. 자질구레한 사무용품도 한데 그러모아 버렸다. 이런 나의 소란함에 팀원들 중 두셋 정도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내게로 꽂히는 시선들이 점점 많아졌다. 그에 개의치 않고 나는 책상을 깨끗하게 비웠다. 그리고 방금 작성한 문서 한 장을 책상 한가운데에 올려 두었다.

  팀원들의 웅성거림에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그대로 내 쪽을 향해 뚜벅뚜벅 다가온다. 나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내 소지품을 담은 작은 상자 하나를 서둘러 집어 들었다. 그리고 팀장이 서 있는 통로를 그대로 지나쳐 성큼성큼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고라니 씨!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야?”

  뒤에서 화가 난 목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앞만 보고 걸었다. 누군가가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팀장님, 이것 보세요.”

  사무실의 웅성거림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그 웅성거림 사이로 팀장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사직서라고?”

  나는 그 고함소리를 뒤로 하고 뛰기 시작했다. 기다란 복도를 있는 힘껏 뛰었다. 여기저기서 힐끔거리는 눈초리가 느껴졌지만 나는 계속해서 뛰었다. 드디어 건물을 빠져나왔다. 이렇게 나오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소울강가까지 나온 나는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여전히 눈부신 소울강이 반짝거리며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나는 허리를 굽혀 상자 안에 담긴 액자를 꺼내 들었다. 파란 하늘 아래 다닥다닥 붙어 있는 주황색 지붕들. 두오모 성당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피렌체의 풍경이다. 나는 액자를 들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가자, 피렌체로.

이전 16화 소설 고라니16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