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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우미 Oct 09. 2022

소설 고라니6

수달

  나무늘보는 어느 날 갑작스럽게 퇴사 소식을 알렸다.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사건이었다. 나무늘보 자신도 예정에 없던 일이라고 했다. 이제 중학생이 되는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 모든 걸 정리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고 했다.

  나무늘보의 퇴사는 내게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입사 초기 때만큼 깊은 교감을 나누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곳에서 유일하게 나를 인정해 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 없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에 나는 막막해졌다. 그리고 이렇게 다 정리하고 떠나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나무늘보가 퇴사한 이후 나는 새로운 사수와 함께 일했다. 새 사수는 다행히도 스컹크처럼 나를 힘들게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내 방패가 되어 주지도 않았다. 그냥 사무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관망만 하면서 자신의 할 일만 하곤 했다. 내게는 여전히 힘든 시간이었지만 나는 그래도 이겨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좀 더 노력하면 나아지겠거니 생각하면서 버텼다.    

 

  수달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정기보고서가 거의 끝나 가는 시점이었다. 수달은 사내 소식지를 만드는 일을 가외로 하고 있었는데 그 소식지에 입사 1년 차 직원의 글을 싣고 싶다고 했다. 1년 동안 지내면서 소회랄까 느낀 점을 짧은 글로 써 달라고 했다. 말이 부탁이지 강제로 시키는 일이었다.

  업무도 아닌 일을 강제로 해야 한다는 자체가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학생 시절에 취미로 조금 글을 써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왕 쓰게 된 거 잘 써 보자 하고 마음먹었다.

  나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글을 써 나갔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업무를 배우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느낀 점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기술했다. 서너 페이지 정도의 분량이었다. 나는 이 글에 어울리도록 제목을 뽑아 보았다. ‘소울강의 사계, 흐르다’ 나는 제목을 소리 내어 읽어 보았다. 제법 만족스러웠다.

  완성된 글을 수달에게 보냈다. 수달은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없었다. 얼마 뒤에 사내 소식지가 나왔다고 연락을 받았다. 나는 소식지를 받아 와서는 팀원들에게 하나씩 나눠 주었다. 마지막 한 권을 손에 들고 나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내가 쓴 글을 찾아보았다. 해당 페이지를 펼치는 순간 나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분명 내 이름이 적혀 있는데 제목이 달랐다. ‘늦은 만큼 한 걸음 더’

  이게 뭐지? 나는 급하게 글을 읽어 내려갔다. 많은 부분이 수정돼 있었다. 이상했다. 나는 이렇게 쓰지 않았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몰랐다.

  며칠이 지나서 나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수달이 임의로 제목과 내용을 바꿨다는 것이다. 왜 내 글에 손을 댔는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수달이 내 글의 제목과 내용을 수정하고 싶었다면 내게 먼저 동의를 구하는 게 순서다. 그런데 내게는 아무런 협의 없이 일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늦은 만큼 한 걸음 더? 누가 늦었다는 거지? 내가? 뭐가 늦었다는 거지? 여기에 늦게 입사했다고 늦었다는 건가? 늦었다고 치자. 뭐가 한 걸음 더라는 거지?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내 글을 이렇게 바꿔 놨단 말인가. 아니, 백번 양보해서 다 그렇다 치더라도 왜 나한테 아무 말도 없이 이렇게 할 수가 있단 말인가. 글을 쓴 당사자한테 수정한다는 사실이라도 알려 줬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애초부터 왜 나한테 글을 써 달라고 요청을 한 것일까.

  하지만 나는 수달에게 화를 낼 기회조차 없었다. 내가 수달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이름뿐이었다. 전화로 글을 써 달라는 요청만 받았을 뿐 얼굴을 직접 마주 해 본 적도 없었다. 게다가 수달은 스컹크와 입사 동기였다. 나는 직접 찾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미 당할 만큼 당해서 내성이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끝이 보이지 않았다. 바닥이 자꾸 아래로 꺼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억울하고 화가 났지만 나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방법을 찾았다. 마침 대학 선배가 리쿠르트 잡지의 기자로 일하고 있었는데 내 상황을 선배에게 설명하고는 내 글을 실어 달라고 부탁했다. 마침 기삿거리가 필요했던 선배는 흔쾌히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래서 다음 호 리쿠르트 잡지에 내 사진과 함께 내 글이 실렸다. 내가 썼던 원래 원고 그대로 말이다. ‘소울강의 사계, 흐르다’

  그렇지만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번듯한 직장에 들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은 야생의 생태계 그 자체다. 노력하면 성과를 인정받는, 그래서 공정한 평가가 실현되는 곳은 아니었다. 여기가 과연 내가 있어도 되는 곳인가 하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대열에서 낙오되는 것이 싫었다. 여기가 좋아서가 아니다. 소속되고 싶은 욕구 때문이 아니라 내가 실력 부족으로 낙오되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어떤 사건이 생길 때마다 내 자존심이 가차 없이 무너져 내리는 걸 느꼈다. 내 존재 자체에 대한 갈등으로 나는 항상 괴로웠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수달이 팀장으로 승진했다. 알고 보니 수달은 승진하기 위해서 매우 열심히 구체적으로 움직인 사람이었다. 사내 소식지 만드는 일도 그 일환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수달은 스컹크와 일본원숭이와 같은 기수인데 그중에서 가장 먼저 팀장으로 승진하게 됐다. 그 기수 중에서는 최초의 팀장 승진이라고 했다. 평균적으로 승진에 소요되는 기간을 생각한다면 수달은 굉장히 빨리 승진한 케이스라고 했다. 그즈음에 스컹크의 얄망궂은 눈매는 더욱 얄망스러워졌고 일본원숭이는 도인 같은 분위기가 더욱 짙어졌다.

  그러다가 결국은 그 사건이 터지고야 말았다. 정기보고서로 대부분의 팀원들이 야근을 하던 중이었다. 나는 출입구 왼쪽에 위치한 프린터에서 출력한 인쇄물을 점검하고 있었다. 페이지를 확인하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는데 퇴근한 줄 알았던 일본원숭이가 쿵쾅거리며 출입문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는 것이 술을 꽤나 마신 듯싶었다. 퇴근 후에 한 잔 걸쳤나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집에 안 가고 사무실로 다시 돌아온 것이 조금 이상하기는 했지만 일이 있어서 다시 들렀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원숭이는 자신의 자리로 가지 않고 출입문 앞에 서 있기만 했다. 뭔가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순간 눈에서 빛이 반짝 보였다. 그리고 사건이 전광석화처럼 전개되었다. 정말로 짧은 순간이었다.

  일본원숭이는 술에 취했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민첩하게 움직였다. 사무실 제일 안쪽에 위치한 족제비 팀장을 발견하고는 출입구 오른쪽에 놓인 정수기에서 20ℓ짜리 생수통을 뽑아 들었다. 그 작은 몸집에서 어떻게 그런 괴력이 나왔는지 모를 일이다. 일본원숭이는 괴성을 지르며 생수통을 든 채로 족제비를 향해 돌진했다. 그런 일본원숭이를 발견한 족제비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싸 안으며 연신 비명을 질러댔다. 일본원숭이는 족제비의 책상 앞에까지 가서 생수통을 세게 집어던졌다. 다행히도 생수통은 빗나갔지만 반 정도 차 있던 물이 여기저기로 마구 쏟아져서 바닥이 흥건해졌다.

  팀원들은 모두가 정지되어 있는 상태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서 제대로 본 사람은 많지 않은 듯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황을 파악하느라 제자리에 서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일본원숭이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씩씩거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술에 취해 험악해진 눈을 가늘게 뜨면서 족제비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족제비는 아직 쪼그리고 앉아 있는 상태다. 일본원숭이는 갑자기 주먹을 들어 올렸다.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 주먹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복도에서 사무실 안을 기웃거리던 남자 두 명이 뛰어 들어와서는 한 명이 일본원숭이가 휘두르려는 주먹을 잡아서 막고 다른 한 명은 일본원숭이의 몸통을 붙잡았다. 우리 사무실에서 나는 큰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 있나 살피러 왔다가 위험을 감지하고 뛰어든 것이었다.

  결국 일본원숭이는 사람들에게 끌려 나갔고 족제비는 자리에서 후들거리면서 일어났다. 스컹크가 족제비에게 달려가 족제비의 옷매무새를 고쳐 준다. 나는 화장실에서 대걸레를 가져와 흥건하게 젖은 바닥을 닦았고 다른 사람들은 바닥에 떨어진 물건들을 정리했다. 이렇게 사건은 종료되었다.   

  다음날 오전에 어제의 사건이 큰 화제가 되었다. 이미 회사 전체에 한 바퀴 돌았을 것이다. 소문은 이러했다. 이번 인사에서 수달을 승진시킨 데 불만을 품은 일본원숭이가 승진심사위원회에 참여했던 족제비를 테러했다는 내용이다. 수달의 승진 과정이나 일본원숭이의 불만이 뭔지 그 당시의 나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만사 개의치 않던 일본원숭이가 그런 행동을 했을 때는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일본원숭이로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술에 취해 사무실에 들어와서 생수통을 던지고 주먹을 휘두르며 족제비를 위협했으니 말이다. 윗선에서도 말이 많았다고 했다. 조용히 덮어 주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징계를 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종국에는 3개월 감봉 처분으로 결론이 났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 일본원숭이의 반응이었다. 일본원숭이가 이 처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과감하게 사직서를 제출한 것이다.

  나는 일본원숭이답다고 생각했다. 일본원숭이는 회사 일을 무료해했다. 그런 모습이 내게는 무책임하게 보이기도 했지만 그런 그를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같이 식사하던 중에 한의사 공부를 새로 시작한 대학 동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며칠 뒤에 일본원숭이가 내게 진지하게 물어봤기 때문이다. 일본원숭이는 그 동기가 지원한 학교나 공부 내용 그리고 학비 등등을 궁금해했다. 일본원숭이는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사직서를 제출한 일본원숭이가 지금 뭘 하면서 사는지는 모른다. 퇴사 후에도 개인적으로 연락하면서 지낼 정도의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그건 나무늘보와도 마찬가지이다. 스컹크와의 사건이 없었다면 나무늘보와는 훨씬 더 가깝게 지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어쨌든 지금은 나무늘보도 일본원숭이도 이곳을 떠나갔다. 내가 아는 사람들이 하나 둘 없어진다는 사실에 나는 힘이 빠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내게 주어진 일을 충실히 하려고 노력했고 업무는 계속해서 배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인정받지 못했다. 외국의 연구현황을 체크하는 가외의 업무도 맡아 수행해서 나름대로 성과를 이루었지만 그것이 인사고과로 연결되는 일은 없었다. 내게서 필요한 결과물만 뽑아 갈 뿐 그에 응당한 대우는 전혀 없었다. 그에 따라 내 갈등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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