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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우미 Oct 09. 2022

소설 고라니5

공벌레

  “고라니 씨, 내가 일이 많아서 바빠요. 팀장님이 사소한 일까지 나한테 넘겨서 내가 정신없으니까 사무실에서 해야 할 일이 있으면 고라니 씨가 나를 도와야 돼요.”

  입사는 나보다 1년 먼저였지만 나이는 나보다 두 살 아래인 공벌레는 자주 이렇게 말했다. 공벌레가 사무실에서 회계 업무를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질구레한 일들을 맡아서 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 일을 내게 시키면서 자신은 팔짱을 끼고 옆에 서 있곤 했다.

  예를 들면 야근 때는 저녁으로 주로 도시락을 주문했는데 공벌레는 팀장이나 선배들 앞에서는 구부정한 등을 더욱 둥글게 움츠리면서 공손하게 주문받은 메뉴를 열심히 메모지에 적고서는 내게 그 메모지를 건넸다. 자연스럽게 음식점에 전화를 걸어 도시락을 주문하는 것은 내 차지가 된다. 그렇게 해서 도시락이 1층 로비에 도착했다는 전화가 오면 내려가서 도시락을 받아 와야 하는데 그때도 공벌레는 꼭 나를 데리고 나섰다. 공벌레가 배달원 앞에서 카드로 결제하는 동안에 나는 비닐봉지 안에 꼭꼭 포장된 도시락의 개수를 확인했다. 공벌레가 결제를 마치고 카드 지갑을 들고 여유롭게 앞장서면 나는 서둘러 양손 가득 도시락을 들고 그 뒤를 따라가야 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팔짱을 낀 채로 벽에 기대선 공벌레 옆에서 무거운 도시락을 들고 있는 나는 자존심이 상했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아마도 그럴 때의 내 얼굴은 경직되어 있었을 것이다.

  간식을 준비할 때도 많았는데 샌드위치 같은 간단한 종류의 간식이 배달될 때도 공벌레는 꼭 나를 불러서 데리고 나갔다. 1층 로비로 나가 보면 달랑 한 봉지 정도의 간식거리가 와 있는데 그것마저도 내가 들게 하고 자신은 팔짱 낀 채로 앞장서서 걸어갔다. 과일 간식을 준비할 때는 사무실에서 과일을 봉지째로 들고 나와서는 탕비실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러면 과일을 씻는 건 내 몫이고 내가 과일을 씻는 동안에 공벌레는 여전히 내 옆에 팔짱을 끼고 서 있다. 그러다가 내가 다 씻은 과일을 접시에 담아 놓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그 접시를 들고 혼자 먼저 사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일하다가 잠시 짬을 내서 쉬는 시간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서 그렇게 준비해 놓은 간식을 먹었다. 그럴 때면 누군가 한 사람쯤은 간식을 준비한 후배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기 마련이다. 바쁜 시간에 도시락을 주문받아 준비해 줘서 고맙다거나 과일 간식은 씻어서 준비해야 해서 귀찮은 일인데도 이렇게 준비해 줘서 고맙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면 그 말을 바로 받아서 공벌레가 말했다.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인 걸요.”

  공벌레는 등을 한껏 구부린 채로 천연덕스럽게 웃고 있었다. 나는 매번 그런 모습을 경직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공벌레도 나처럼 스컹크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공벌레도 처음 입사했을 때 스컹크가 괴롭혀서 자주 울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실제로 스컹크가 공벌레에게 무자비하게 대하는 모습을 나도 목격한 적이 많았다. 어쩌면 그나마 지금은 내가 있기 때문에 공벌레가 조금은 편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공벌레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한 번은 내가 모니터 앞에 앉아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갑자기 내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만요.”

  바로 그 순간 앉아 있던 내 몸을 밀치면서 두 손이 내 몸 앞에 놓여 있는 키보드 위로 올라왔다. 공벌레였다.

  “여기 오타가 있어요.”

  공벌레가 키보드를 두드려 글자를 바꾸고는 순식간에 파일 저장 단축키를 누르는 것이 아닌가.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가 작업하고 있었는데 내 업무에 갑자기 끼어드는 것 자체가 매너 없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내 모니터에 오타가 보였다면 좋다, 그렇다면 내게 오타가 있다고 알려 주면 그만인 일이었다. 그런데 나를 밀쳐내고 자신이 내 문서를 직접 수정한 것이다. 더군다나 자기 마음대로 저장 단축키를 누르다니.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가 버리는 공벌레의 뒷모습을 나는 입을 벌린 채로 바라보아야만 했다.

  어느 날인가는 일이 많이 늦어져서 지하철이 끊겼을 때였다. 나는 그때 집에서 독립해 나와서 회사 근처에 혼자 살고 있었다. 택시를 타면 기본요금으로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였다. 다른 팀원들이 잘 잡히지 않는 콜택시를 부르느라고 약간 소란스러운 분위기였다. 나는 천천히 큰길로 걸어 나가 지나가는 택시를 잡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공벌레가 내게 말을 붙였다.

  “고라니 씨는 집에 어떻게 가요?”

  “저는 요 앞에 나가서 택시 타려고요.”

  “대교 건너서 가는 방향 맞지요?”

  “네, 그쪽으로 가요.”

  “그러면 나도 같이 가요. 같은 방향이니까.”

  나는 별로 내키지 않았다. 둘이 가면서 할 얘기도 없었고 그다지 얘기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공벌레와 한 택시를 타고 출발했다. 나는 불편한 침묵 속에서 가만히 있다가 내가 내려야 할 곳이 가까워지자 급하게 말했다.

  “저기 횡단보도 앞에서 내려 주세요.”

  그때였다. 공벌레가 황급히 내게 말했다.

  “고라니 씨, 만 원짜리 한 장 있어요?”

  나는 공벌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만 원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공벌레는 내 손에 들린 만 원짜리 지폐를 낚아채듯이 가져갔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수고했어요. 내일 봐요.”

  이렇게 말하면서 공벌레는 자세를 고쳐서 앉고는 택시기사를 향해 자신의 행선지를 말했다.

  나를 내려놓은 택시는 이제 저만치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택시에서 내린 자리에 덩그러니 선 채로 어안이 벙벙해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공벌레는 어찌하겠다는 말도 없이 돈을 가져가 버렸다. 나는 기본요금만 내면 되는데 왜 나한테 만 원이 있냐고 물어본 거지? 공벌레가 나한테 돈을 빌려 간 건가? 혹시 내일 만나면 돌려줄 건가? 얼마를 돌려줄 생각인 걸까? 어차피 자기가 가는 길 도중에 내린 거니까 나한테 만 원을 줄까? 아니면 반만 주려나? 그런데 반을 돌려받아도 내가 더 많이 부담하는 건데 어느 경우가 됐든지 간에 이건 좀 이상하다.

  나는 어이없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했다. 공벌레는 도무지 예의라곤 없는 사람이다. 업무에 관해서라면 백번 양보해서 자기가 선임이니까 내게 그렇게 대했다고 치더라도 사적인 일에서까지 내게 이렇게 하는 건 너무나 지나친 일이다.

  다음날 출근했을 때 공벌레는 내게 택시비에 대한 얘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여전히 한껏 등을 구부린 채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굽신거리고 있었다.     


  공벌레는 내게 두 개의 얼굴을 보여 주었다. 윗사람들 앞에서는 한없이 부드럽고 연약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내 앞에서는 한껏 거드름을 피우면서 위세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느 얼굴이 진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 방식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라지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 된다. 게다가 자신이 당한 방식 그대로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착잡한 심경이었다. 하지만 이건 확실하다. 아닌 건 아닌 것이다. 내 양심을 속이면서 아닌 길로 갈 수는 없다. 나는 내 밑으로 후배가 들어오면 이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바르고 정당하게 대우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게 옳으니까. 내가 당했다고 해서 똑같이 대물림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틀린 게 있다면 고쳐 나가야 한다. 안 그래도 사회생활이라는 것은 항상 어려운 법이다. 그 어려움을 서로 도우면서 극복해 나가면 되는데 왜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하면서 서로 힘들어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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