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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달 Jun 25. 2022

첫 직장에 잘못왔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ep1.연수원

달아날 수 있을 때 도망쳐라

본캐는 김과장, 부캐는 교관


연수원 첫 날, 이 것은 군대 체험 예능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MBC에서 방영했던 <진짜 사나이>처럼 군대 설정 안에서 구성원의 협력과 성장을 도모하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침마다 6시 기상, 아침 실외 점호에 이어 구보를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하는 것은 연수생들의 체력 증강을 위한 것이리라.



밤마다 하는 점호는 좀 더 철저했다. 한 방에서 4명의 연수생들이 생활했다. 교관은 이불과 베개의 각을 맞추고, 오 와 열을 맞추어 각자의 침대 앞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정자세로 앉으라고 지시했다. 밤 점호가 시작되면 복도 끝에서부터 교관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거밖에 못합니까!" 쩌렁쩌렁 울리는 교관의 목소리에 복도는 한 순간 긴장감에 휩싸인다.

 

아차차, 착각했다. 교관이 아니라 김과장이다. 원래 수련을 담당하는 역할이냐고? 전혀 아니다. 지점에서도 일했고, 본부 부서에서도 일하다가 이번에 신입 연수를 담당하게 된 평범한 은행원이다. ‘서는 곳이 다르면 풍경도 달라진다’는 웹툰 『송곳』(2013,최규석)의 대사는 김과장을 두고 하는 말이다. 김과장이 방 문 앞에 서면 방장은 구령에 맞추어 방번호와 본인의 이름을 외친다. 나머지 셋은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적당한 속도로 본인의 이름을 따라 외친다. 김과장은 화장실과 방 정리 상태를 확인하고 각과, 오와 열이 맞추어지지 않은 부분을 짚어내 "이거밖에 못합니까!" 호통을 치고 다른 방을 검열한 후 다시 돌아온다.

 

여기까지는 은행이 신입행원들을 맞이하는 독특한 환영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연수원에 있을 때, 합격했던 다른 기업 인사부에서 전화가 왔다.

"십입사원 오리엔테이션인데 안 오시나요?"

"아 제가 다른 곳으로 가기로 해서요."

"혹시 어디인지 알 수 있을까요?"

"은행이요."

"아... 다들 은행갔다가 후회하던데, 연수일 이전에 기회되면 돌아오세요."

나는 이 전화를 무시하면 안 되는 거였다. 공포 영화에서 되돌릴 수 없는 위기는 극 후반부에서야 나타난다. 연수 일정 마지막, 100km행군에 이르러서야 나는 내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무엇을 위하여 연수생들은 100km를 걸었나   

  

100km 행군은 지금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연수 일정이다. 당연하게도 지금은 하지 않는다고 한다.


영하로 떨어지는 2009년 1월 겨울의 절정, 귀마개, 모자, 마스크로 얼굴까지 무장을 하고 200명이 넘는 신입 행원들은 깃발을 들고 100km를 걸었다. 이미 다른 곳으로 도망갈 수 있는 기회는 지난 때였다. 100km 행군을 연수 초반에 했더라면 나는 분명 이곳을 뛰쳐 나갔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무척 궁금했다. 100km를 걷는 것이 은행 업무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순발력이 필요한 대부분의 운동에는 소질이 없었어도, 등산과 오래달리기, 오래 매달리기 같이 지구력을 요하는 운동에서는 절대 뒤지지 않은 나였다. 70km가량 걸었을 때 곧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필 생리기간과 겹쳐 허리는 끊어질 듯 했고, 피가 많이 나올 때여서인지 하늘이 핑핑 돌았다. 다행히도 관광버스 한 대가 행군을 따라오며 쓰러지는 연수생들을 차에 태웠다.


이렇게까지 행군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이것을 기획한 이를 안다면 진심으로 정중하게 물어보고 싶다.


버스 입구에는 정대리가 있었다. 나와 같은 가임기 여성이니 상황을 이해해 줄거라고 생각했다.

“제가 지금 생리 중인데, 곧 쓰러질지도 몰라요. 차에 좀 타야겠어요.”

“지금 차에 아픈 사람들 안 보입니까? 저기 걷는 동료들 안 보입니까?”


군대에 가본 적 없는 정대리는 놀랍게도 '다,나,까'를 붙여 말했다. 대리 직급을 단지 얼마 되지 않은 그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조직에 적응하는 법을 알았다. 큰 조직에서 오래도록 일하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먼저 눕는 잡초같은 적응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마치 나는 전쟁터에 나온 군인과 같았다. 이유 불문 버스에 올라타는 것은 전우를 버리는 치사한 일이라는 듯, 그는 나를 노려보더니 더는 말을 걸지 못하도록 단호하게 고개를 돌렸다. 놀랍게도 그렇게 말한 본인은 버스를 타고 있었다. '너는 연수생이고 나는 상관이야'라며 집단 내 위계까지 체득한 그는 나와는 별 차이 나지 않는 대리에 불과했다.


나는 남은 30km를 걷는 동안 아무도 들리지 않는 작은 소리로 마스크 안에서 입을 오물거리며 정대리에게 온갖 험한 욕설을 퍼부었다. 욕하는 것이 힘이 되었는지, 기적처럼 100km 행군을 완수했다. 연수가 끝나고 몇 명의 동기로부터 ‘그 뒤로 무릎에 물이 차서 물리치료를 받고 있다.’, ‘그 뒤로 생리가 끊겨서 산부인과를 다니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같은 시기, 친구 H는 S은행 연수 중이었다. S은행은 연수생들에게 기마자세를 시킨다고 했다. 오직 S은행에만 합격했기에 H에게는 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기마자세를 하며 어두운 앞날에 눈이 깜깜해진 H에게 K기업으로부터 연락이 온다. '귀하는 본사의 신입 공채에 최종 합격하였습니다.' H는 빛의 속도로 짐을 싸 연수원을 탈출했고,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K기업의 우수사원으로 일하고 있다. 버티면 좋은 날이 온다고 누가 그랬던가. 우리는 달아날 수 있을 때 도망쳐야 한다. 기회를 놓치면 다음 기회는 영 오지 않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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