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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달 Jun 30. 2022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신화

거짓 신화에서 탈출하기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신화


아이를 키우면서 정말 의문이었던 것이 있다. ‘왜 모든 것을 엄마 탓이라고 하는 거지?’


‘엄마가 열 달 동안 아이를 품고 큰 고통 안에서 출산을 경험하니까, 낳고 나서는 아빠랑 나누어서 해야겠다.’


현실적 자각 없이 책을 보고 출산을 결심했던 애송이 엄마는 육아에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접근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어른들은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고 반복해서 알려주었다. 주부로 아이를 온전히 길러낸 경우에도, 직장일을 하며 아이 양육에 힘쓰지 못한 경우에도,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직장에서는 “여직원들은 아이를 낳고 나면 아이 키우느라 직장일에 전념하기 어렵지.”라며 일하는 엄마를 배려했다. 출산한 여성은 중요한 일 또는 승진에서 배제되었고, 아이가 있지만 양육의 의무는 없는 남성에게는 야근과 회식이 장려되었다. 직장에서 중요한 일에 참여할 수 있는 여성은 아이를 낳지 않았거나, 낳은 아이를 또 다른 여성(대개는 그의 친정어머니)이 전담하는 경우였다.


‘육아를 배우자와 함께 해야겠다.’는 생각은 장래 희망보다 이루기 어려운 꿈임을 아이를 낳고 난 이후에야 깨달았다. 어떠한 논의도 없이 가사와 돌봄은 육아휴직 중인 나의 일이 되었다. 남편은 육아 도우미로 아빠의 정체성을 형성했는데, 바쁜 회사 일로 대부분 돕지 못했고 가끔 돕는 날에는 스스로 뿌듯해했다. 이미 만들어 놓은 이유식을 아이에게 먹이며 “나 정도면 굉장히 많이 돕는 편이다.”라고 말하는 남편이 눈물 나게 부러웠다. 나도 그처럼 말간 얼굴로 딱 저만큼 돕고 ‘굉장히 많이 돕는 편’이라고 말하며 으스대고 싶어졌다.


내가 일을 하면 그것이 가능해질까. 몹시 일하고 싶어진 나는 육아휴직 도중 서둘러 직장에 복귀했다. 놀라운 것은 내가 일을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돌봄을 그만둘 수 없었던 나는 직장에서 중요한 일을 맡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제외되는 것을 선택했다. 직장에서 소외될 수 없었던 남편은 여전히 돌봄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일에 열중하는 것을 선택했다. 나는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나만의 생각이었다. 모두가 같은 이야기를 할 때 혼자서 다른 이야기를 하면 틀린 것이 된다.


*2022년도 2분기 합계출산율 0.75명 역대 최저치 ('6월 인구 동향', 2022. 8. 24. 통계청 발표)


가장 먼저 결혼하고 가장 먼저 아이를 낳은 나를 보고 친구들은 말했다. "결혼을 꼭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아이를 낳는다는 건 많은 걸 포기해야 하는 거구나" 우리나라 출산율을 떨어뜨리는데 나도 한몫한 것 같다. 어떤 친구는 결혼을 미루었고, 어떤 친구는 결혼은 하되 아이는 낳지 않기로 결심했다.


출산율이 급격히 떨어지는 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만큼 해결책도 다양할 것이다. 그중 우리가 먼저 할 수 있는 것.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비뚤어진 신화에서 하는 것이다. 아이를 키워내는 숭고한 일은 부와 모의 일이 되어야 한다. 부와 모가 함께 가정에서 협력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 때, 기업과 사회가 양육의 안전망을 제대로 구축할 때, 그래서 아이를 키우는 일과 자신을 키우는 일이 더 이상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닐 때, 우리는 아이를 갖는 삶을 그려볼 수 있다.







아이가 아픈 것은 엄마 탓이 아닙니다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고 모두가 한 입으로 말할 때, 혼자서 다른 말을 하면 틀린 것이 될 테니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아이를 키우면서 더 충격적인 상황을 마주했다. 일방적으로 양육을 엄마의 역할로 전가한 것으로 모자라, 아이가 잘못되면 그에 대한 책임까지 엄마의 탓으로 돌렸다.


아이가 건강하지 못하면 ‘그러니까 엄마가 아이를 잘 먹였어야지.’, 아이가 버릇이 없으면 ‘애 엄마가 애를 어떻게 교육했길래 저래.’, 아이가 공부를 못하면 ‘엄마가 아이 공부에 관심이 없나 봐.’라고 말한다. 처음 아이를 키울 때에는 아이가 아프면 아픈 아이를 보며 내 마음도 아팠고, 일하는 엄마여서 제대로 돌보지 못해 그랬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아이가 왜 아프니?’, ‘그러니 아이를 잘 챙겼어야지.’라는 애정 어린 질문과 조언은 모두 엄마인 나에게로만 향했고 괴로웠던 나는 죄책감까지 짊어져야 했다.


회사를 그만둔 이후에야 아이가 아픈 것이 내 탓이 아니란 걸 알았다. 엄마가 키우는 데도 우리 아이들은 환절기면 소아과를 찾았다. 가끔 배탈이 나기도 하고 독감에 걸리기도 했다.


심각한 저출산 시대라는데 소아과에는 항상 아이들이 넘쳐났다. 직장에 다닐 때에는 주말에나 병원에 갈 수 있었으니 소아과에 사람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평일 낮 시간에도 미세먼지가 심각할 때, 유행병이 돌 때, 아이들은 엄마 손을 잡고 할머니 손을 잡고 때로는 아빠 또는 시터와 함께 병원을 찾았다.


나는 왜 아이가 아프면 내 탓이라고 생각하고 괴로워했을까. 소아정신과 의사 오은영 박사는 한 강연에서 “우리나라 부모님들은 아이가 아프면 ‘엄마가 잘못했어. 다 엄마 잘못이야.’라고 울면서 병원을 찾아요. 아마 유교적 영향이 크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라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이가 아프면 부모님 마음이 아픈 건 당연하죠. 그런데 그렇게 울면 아이도 놀라고 별 도움이 되지 않아요. 왜 아픈지 진단하고 처방하면 되거든요.”라고 덧붙인다.


아이가 아픈 것은 부모, 특히 엄마 탓이라는 왜곡된 시각. 일과 가정에서 주어지는 과도한 역할에 어느 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는 자괴감. 그 안에서 애송이 엄마였던 나는 스스로를 탓하는 가장 간편하고 잔인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 세 살까지 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말은 폭력이야."

"맞아, 나 그 말 진짜 싫어."

"이 세상에는 너무나 폭력이 난무해."

"아직도 그런 말이 나돈단 말이야?" 


며칠 전 두 돌이 갓 지난 아이를 키우는 친구와 나눈 대화이다. 10년 전 '세 살까지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말이 나는 지겹도록 싫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말은 난무하면서 열심히 아이를 키우는 엄마를 아프게 한다.


일하는 엄마가 아이를 3년 키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하지 않더라도 나의 또 다른 삶을 꿈꾸는 엄마에게 3년은 나를 뒤로 미루어도 될 만큼 짧지 않다. 양육을 엄마만의 의무로 상정하고 불가능하고 어려운 것을 당연히 해내라고 요구하는 것은 폭력이다.


아이는 엄마 책임이라는 그릇된 신화에 나는 속수무책 무너졌다. 엄마 역할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나는 이제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다. 아이는 아빠와 엄마가 함께 키우는 것이라고 믿는다. 아빠와 엄마의 여력이 되지 않을 때에는 조부모 또는 사회적 돌봄 서비스에 도움을 구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아플 때 나를 탓하는 잔인한 선택 대신, 병원에 가서 그에 맞는 처방을 받는 합리적인 선택을 취한다.


모두가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라고 말할 때, 그래서 모든 게 내 탓인 것만 같았을 때, 나는 아이를 온전히 사랑하지 못했다. 사랑하면서도 원망했고, 돌보면서도 집착했다. 아이가 아프거나, 잘못된 행동을 하거나, 공부를 어려워할 때, 이제 나는 그것이 내 탓이 아님을 안다. 나와 아이를 분리하고서야 '어떻게 도와주어야 할지.'를 생각할 수 있다. 물론 그 방법은 아이 아빠와 엄마인 나, 그리고 아이가 함께 찾는다. 나는 비로소 아이에 대한 원망과 집착에서 벗어나, 아이를 사랑하는 올바른 방법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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