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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달 Jun 29. 2022

슬픔을 몽땅 흡수한 집이라는 공간

내가 집에서 벗어나려는 이유

소설가 김영하는 그의 책 『여행의 이유』에서 ‘집은 의무의 공간’이라고 말한다. 그는 데이비드 실즈의 글을 인용하며 “잠깐 머무는 호텔에서 우리는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다”고 덧붙인다. 



나는 가끔 혹은 자주 집을 나오고 싶었다.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의 노는 소리는 청량한 주말 아침 지저귀는 새소리가 아니었다. 아이들의 다투는 소리는 때로는 날카로운 송곳이었고 가끔은 엄청난 천둥번개였다. 그 안에 있다 보면 심장이 쿵쾅대며 불안했다. 


설거지를 하고 돌아서면 옷가지가 너저분하게 널려있고, 그것들을 드러내면 과자 부스러기며 종이 쪼가리가 어김없이 나타난다. 사력을 다해 정상에 올린 돌이 다시 굴러 떨어져 똑같은 고행을 영원히 반복해야만 하는 시지프스처럼, 끊임없이 의무가 주어지는 집에서 나는 도망치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도망치려는 마음을 가진 것에 죄책감이 들었다. ‘아이들과 행복한 시간을 함께 하고 싶어서 직장을 그만두었던 것 아닌가. 함께 하는 이 시간을 고통으로 느끼는 나는 엄마 자격이 있는 걸까. 결국엔 아무것도 책임지고 싶지 않은 나는 이토록 이기적인 걸까.’ 좌절과 죄책감의 굴레에서 헤매던 나는 ‘작가와의 만남’에서 김영하 작가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 것일까요?”라는 질문으로 운을 띄운 그는 불륜, 퇴폐, 살인 사건이 난무하는 소설을 읽으며 독자는 그 안에서 자기를 발견한다고 했다. 부조리의 극단에 서 있는 소설 속 인물을 보며 독자는 ‘이 인물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었네.’라고 공감하거나, ‘이에 비하면 내 삶은 살만하다.’고 느끼며 힘든 현실을 이겨낸다는 것이다. 


그의 책과 이야기에서 엄마라는 의무에서 벗어나고 싶은 감정이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그저 ‘의무의 공간’에서 자유롭고 싶었을 뿐이고, 여행, 산책, 쇼핑, 독서 등 일탈의 경험이 다시 집이라는 공간에서 아이들과 행복할 수 있는 용기를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행지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여행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p179~180, 김영하, 『여행의 이유』, 2019)     


둘째 아이를 가졌을 때 나는 어디로든 떠나야겠다고 결심했다. 육아휴직 첫날, 친구가 있는 싱가포르로 향했다.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 나는 온전히 혼자였다. 무찔러도 무찔러도 다시 쳐들어오는 연속된 업무도 오늘부터는 내 일이 아니었고, 싱가포르에서의 3일 동안은 육아도 가사도 내가 알 바 아니었다.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을 벗어던지고 ‘아무것도 아닌 자-nobody’가 된 순간, 나는 오롯이 나 자신일 수 있었다.


친구 J는 미국 MBA 과정 중 하나로 싱가포르에 교환학생으로 가 있었다. 그는  완벽한 somebody의 모습이었다. 신입사원 시절, 퇴근 후에 만나 함께 직장과 상사를 질겅질겅 씹어주고, 주말에는 도서관에서 만나 무언가를 함께 공부하던 친구는 본인이 원하는 일을 찾기 위해 미국 MBA에 진학했다. 싱가포르에서 만난 J는 온전히 본인에게 몰두하는 다이내믹한 삶을 살고 있었고 나는 그 모습이 대리만족이 되어 좋았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고 무엇인가가 되기 위해 떠난 J는 'somebody'로서, 한국에서의 모든 역할을 잠시 잊고 낯선 나라에 온 나는 ‘nobody’로서 ‘나 자신’이 되어 만났다. 2014년 봄, J는 무언가가 됨으로써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됨으로써 '나 자신'이 되었는데, 이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한 것일까. 


나에게는 부여된 정체성이 많았다. 기존에 갖고 있던 '나'이며 한 가족의 '딸'이라는 정체성에 더해, 결혼과 출산으로 인해 '아내', '엄마', '며느리'의 역할이 추가로 부여되었다. 결혼과 출산은 당시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분량의 역할을 요구했고, 나는 그 안에서 '나 자신'를 지키는 법을 알지 못했다. 모든 요구를 노력으로 충족시킬 수 없다고 느낄 때 ‘잠시 나를 잊음'으로써,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갈 에너지를 얻었다. 덥고 습한 싱가포르 공기에 나는 무거웠던 역할을 증발시켜 흩뿌려뜨리고, 3일 후 한결 가벼워진 채 일상으로 돌아왔다. 





집에서 나만의 공간을 찾을 수 있을까



자기만의 공간을 소유한다는 것은 자기만의 시간을 확보한다는 의미다. 반대로 자기만의 공간이 없다는 것은 자기만의 시간이 언제든 방해받을 수 있다는 의미다. 엄마의 독서, 사색, 휴식은 수시로 멈춰졌다. 할머니가 집안일을 시키거나 아빠가 출출하다고 말할 때, 또는 나와 동생이 사소한 것을 요구하는 순간에. 

(p.132,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하재영, 2020)     


둘째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지금 이 동네로 이사를 왔다. 유명 학군지는 아니지만 학교와 학원이 걸어 다니는 거리에 있는 동네이다. 부동산 가격이 한참 오르던 2020년 여름, 살던 집을 팔고 전세자금대출을 받아 지금의 집으로 이사했다. 


초품아(초등학교를 품은 아파트)로 구성된 동네에는 다양한 종류의 학원이 도보로 접근 가능했다. 이 곳으로 이사한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이 점이었다. 학교와 학원 스케줄을 잘 짜 놓으면 하루 중 많은 시간을 오롯이 나만의 것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아이 둘이 초등 1학년, 4학년이 되던 2021년, 여전히 코로나는 진행형이었고 학교와 학원이 완벽하게 연계되는 아이들의 스케줄을 짜는 건 불가능했다. 


 “엄마 오늘 점심은 뭐예요?” 

 “엄마 뭐해요?” 

 “엄마 나 뭐 좀 갖다 줘요.”

 

등교 수업과 줌 수업을 번갈아 하던 4학년 아이는 줌 수업을 할 때면 매 순간 나를 찾았다. 


 “엄마 형아가 괴롭혀요.” 

 “엄마 놀아줘요.” 

 “엄마 배고파요.”


1학년이라 매일 등교 수업을 하지만 단축수업으로 일찍 하교한 둘째 아이 또한 수시로 엄마를 찾았는데, 설상가상 큰 아이와 작은 아이가 만나는 오후에는 형제의 결투가 이어지면서 집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이사한 집은 안방이 그 전 집보다 컸다. 방 한 켠에 작은 책상을 가져다 두고 나만의 공간으로 정했는데, 그 공간에서의 시간은 걸핏하면 멈춰졌다. 집에서 시간은 여전히 나의 것이 아니었다. 오전은 집에서 줌 수업을 듣는 큰 아이를 챙기고 소소한 집안일을 하느라. 오후는 아직 돌봄이 많이 필요한 둘째 아이를 챙기고 간식과 저녁을 준비하느라. 남편이 퇴근하면 내 얼굴은 흙빛이 되어 있었고, 그 얼굴을 보는 남편의 얼굴도 어둡게 변했다. 


이사를 오면 무언가를 시작하리라 기대했는데 쉽지 않은 상황이 이어지니 가슴이 답답했다. 전무후무한 코로나 감염병의 여파로 물리적으로도 갇혀 사는데, 심리적 우울감까지 정신세계를 속박하는 것에 속수무책 당하고 있기는 싫었다. 어딘가로 떠나야 했다. 소설가 김영하가 말한 '소설'이든, '여행'이든, 작가 하재영이 말한 '자기만의 공간'이든 말이다. 


1시간 30분, 둘째의 학원 수업 시간. 아이를 학원에 데려다주고 그 앞 카페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90분 동안 집중해서 책을 읽는 것이 가능하자, 나는 공부를 시작했다. 평소 관심 있던 심리학을 배울 수 있는 대학원을 물색했다. 대학원에 들어가기 위한 공부에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첫째가 등교수업하는 날 오전, 저녁 식사를 마친 이후, 공부 시간을 조금 더 늘렸다. 몰두하는 것이 생기니 얼굴이 밝아졌다. 밝은 아내의 얼굴을 마주하는 남편의 얼굴도 이제 더 이상 어둡지 않았다. 이사 온 지 6개월, 나는 바라던 대학원에 합격했다. 


 




어릴 적, 어른이 되면 무언가가 되어 있으리라고 상상했다. 분명 그 무언가가 아내 혹은 엄마는 아니었다. 3일간의 싱가포르 여행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어도 되는 시간을 가졌다. 무언가가 되려던 나는 아무것도 아닌 내가 됨으로써 나를 찾았고, 일상을 살아갈 에너지를 얻었다. 


아이들 학교 근처로 이사 가면 엄청난 시간을 나만의 것으로 확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계획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의 시간을 만들어낸 것은 단 90분이 그 시작이었다. 



영화 <기생충>에서 송강호는 아들에게 "아들아, 역시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라며 감탄한다. 하지만 이야기는 계획대로 전개되지 않고 결국 비극으로 끝난다. 


나의 인생에는 언제나 계획이 있었다. 계획대로 되는 상상을 하면 머리 위로 Big Ficture가 펼쳐진다. 하지만 언제나 현실은 계획과 다르게 전개되었다. 다행히 인생은 영화와는 달라서 비극으로 끝나진 않았다. 대신 Small Ficture로 전개되었는데, 그 과정에는 '3일간의 여행' 또는 '카페에서의 90분'과 같은 아주 작은 일상에서의 탈출이 있었다.  


내가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사는 한, 집이라는 공간은 역시 나만의 공간이 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잠깐의 탈출이 나를 '나 자신'으로 살게 하며, 그 시간이 집에서의 나를 '이만하면 괜찮은 아내와 엄마'로 살게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나에게 탈출은, 탈출하려는 욕망은 불가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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