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다니던 유치원은 인기가 많았다. 지원자가 많아 추첨에서 뽑혀야만 다닐 수가 있었다.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에는 아이들이 뛰놀기에 충분한 동산이 있었고, 유치원과 예배당 건물 옆으로 모래놀이센터가 있었다. 아이들의 마음을 키우는 유치원이었다.
유치원에서는 매달 부모교육이 있었다. 이곳에서 부모의 마음도 키울 수 있으려나. 유치원에서는 1년에 3번 이상 불참할 경우 다음 해에 재원 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교육 참여를 강권했다. 3년 뒤면 둘째 아이도 보내야 할 테니 나는 부모교육에 꼬박꼬박 참여했다.
'부'와 '모'를 위한 부모 교육에 참여하는 것은 주로 엄마들이었다. 강사는 교육에서 아이의 잘못된 행동의 원인이 주양육자인 엄마의 태도에 있다고 했다. 엄마가 더욱 따뜻하고 온정적으로 변해야 아이도 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아이가 화를 내어도 엄마로서 수용해주어야 하고, 아이가 짜증을 내어도 엄마는 스스로 감정을 조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양육자가 엄마라면, 이 엄마는 대부분의 시간을 아이와 함께 하는 것일 텐데, 반복되는 아이의 짜증과 보챔을 일방적으로 수용하고 본인의 감정을 조율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나 한 걸까. 더욱 기괴한 것은 그 말을 듣고 ‘역시 문제는 나였어.’, ‘오늘은 아이에게 좀 더 따뜻하게 대해야지.’하며 다들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광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고백한다. 그 집단에서 가장 뜨거운 눈물을 흘린 엄마는 나였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 얼마 있지 않아 하원한 아이에게 평소보다 따뜻한 말을 건넸고 품에 꼭 안은 채 모성애 가득한 밤을 보냈다. 하지만 다음 날 이내 아이의 행동에 화를 내고 소리를 질렀다. 그런 이후에는 역시 나는 수용력이 떨어지고 감정 조절에 실패한 나쁜 엄마라는 죄책감에 좌절했다.
그런데 이 광경, 무언가 익숙하다. 초등학교 시절 2박 3일 수련회 마지막 날 밤, 군대식 지옥훈련에 단체 기합을 받아 지칠 대로 지친 아이들을 광란의 장기자랑으로 흥분시켜 놓는다. 축제는 끝나고 다들 촛불을 켠다. 극적으로 고요한 음악을 BGM 삼아 교관은 낮고 굵은 목소리로 아이들을 향해 외친다.
“자 우리 모두 부모님의 사랑을 떠올려봅시다.
그동안 우리는 부모님의 크신 사랑을 너무 당연하게만 생각해왔습니다.
오히려 불평하고 화를 내었죠.
과연 나의 행동은 부모님의 그 크신 사랑에 합당한 것이었을까요.
자 이제 눈을 감습니다.
엄마, 아빠 죄송했다고 말해봅니다.
엄마, 아빠 이젠 사랑한다고 외쳐봅니다.”
하나 둘 훌쩍이던 아이들은 교관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격정적으로 울려 퍼지자, 급기야 어깨를 들썩이며 꺼이꺼이 통곡을 쏟아낸다. 그렇게 집에 돌아와서 아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불평하고 화를 내고 부모님 속을 썩인다.
역시 나를 탓한다고, 운다고,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엄마 탓에서 벗어나 아이를 바라볼 때 따뜻한 수용이 이루어진다.
나름 시간을 내어 찾은 부모교육에서 자꾸 엄마만 탓하니 어느 순간 배알이 꼴렸다. 최소한으로만 교육에 참여했다. 강사가 진지하게 엄마가 변해야 한다고 말하면 ‘또 시작이네.’라고 생각하며 한 귀로 흘렸다. 나는 사춘기 반항아 같은 태도로 교육 시간이 어서 끝나기만을 바랐다.
부모 교육과 육아서를 비롯한 모든 부모 교육 콘텐츠에 대한 불신이 가득한 채로 아이를 키웠다. 나의 태도가 바뀐 것은 큰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이다. 아이 학교에서 진행한 3회기의 부모 교육을 듣고 나서였는데, 주제는 ‘TCI*로 본 나와 내 아이의 기질과 성격’이었다. 같은 지역 대학의 아동가족학과 교수가 진행을 맡았다.
강의에서 교수는 인간에게는 기질과 성격이 있다고 했다. 기질은 변하지 않는 것이고 성격은 변할 수 있다고 말했다. A기질을 가진 아이에게 B기질을 가진 부모는 C의 방법으로 소통하는 것이 좋다고 알려주었다. 아이가 사회에 잘 적응하기 위해 아이의 기질을 수용하고 성격을 발달시켜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고 덧붙였다.
내가 힘들어했던 아이의 모습은 나 때문이 아니었다. 아이가 기질적으로 그렇게 타고난 성향이 있었을 뿐이다. 기질에 좋고 나쁨은 없다. 아이와 나의 기질을 이해하고 나니 어떻게 해야 할지가 궁금해졌다. 이 아이에게는 어떻게 말해주는 것이 효과적일까. 어떻게 말해주었을 때 지금과 다르게 반응할까.
아이의 잘못은 엄마 탓이라는 메시지는 나에게 죄책감을 주었다. 아이가 짜증을 내면 나는 참고 또 참았다. 눌렀던 감정은 머리까지 차올라 어김없이 폭발했다. 폭발한 감정은 처음 화가 났을 때보다 위험하고 거대해져 아이에게 상처를 줄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나 스스로를 산산조각 냈다. 어린아이 앞에서 본인 감정 하나 제대로 조절하지 못한 나는 열패감에 휩싸여 도망치고 싶었다.
운다고 달라지는 건 없기에, 엄마를 탓하는 부모교육에서 우리는 달아나야 한다. 부모가 본인과 자녀를 분리하고 자녀의 기질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때, 아이를 온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를 이해했을 때, 갈등이 아닌 대화가 이루어진다. 아주 사소한 한 마디 말이 엄마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 그러니 아이의 잘못은 엄마 탓이 아니다.
어릴 적 수련회를 다시 떠올린다. 어두운 밤 촛불을 켜고 부모님을 그리며 눈물을 쏟는 이벤트는 쇼(show) 자체로 극적이고 훌륭했다. 하지만 쇼(show)는 막이 내리면 끝난다.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눈물보다는 이해와 시도이다. 아이들에게 불평과 불만 대신 어떻게 원하는 것을 부모에게 말해야 할지 알려주었어야 했다. 가족은 하나의 작은 사회이다. 아이가 부모에게 시도한 건강한 의사소통은 아이가 사회에서도 건강하게 소통할 수 있도록 돕는다.
"애는 도대체 누굴 닮아 이러는 거야!"
때로 부모는 이런 말을 하면서, 엄마는 아빠를 아빠는 엄마를 슬쩍 미루어 본다. 기질에 대해 강의했던 교수는 "누굴 닮았겠어요, 엄마 아니면 아빠겠지. 기질은 유전된답니다."라고 말했다. 유전이라면 역시나 엄마 탓은 아니더라도 부모 탓인 거 아니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질에는 좋고 나쁜 것이 없다. 가령, 어른의 지시나 학교 규칙에 잘 적응하는 순응성 기질의 아이들은 감각과 인지적 자극에 둔감할 수 있다. 환경을 섬세하게 자각하고 본인의 의사 표현에 적극적인 민감성 기질의 아이들은 불편한 감정을 강렬하게 표출할 수 있다.
아이의 타고난 성향, 기질을 이해하고 나는 나를 탓하는 것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대신 아이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려고 노력한다. 아이가 짜증을 내면 무엇 때문에 그럴까 궁금해한다. 짜증을 낸 이유를 말하면 충분히 들어준다. 앞으로는 짜증 대신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좋을지 물어보거나 알려준다. 다음번에 아이가 화내지 않고 말로써 표현하면 "그렇게 말해주어 고맙다."고 말한다.
엄마를 탓하는 신화에서 해방된 엄마는 이제 울지 않는다.
*TCI(Temperament and Character Inventory) : 기질 및 성격 검사 도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