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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달 Jun 23. 2022

자본가가 되면 직장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버티거나 나가거나, 쿨하려면 돈이 필요해

 노동의 소득 증가율은 자본의 소득 증가율을 따라가지 못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는 더 많은 돈을 벌게 될 것이고 소득격차는 심화것이라는 프랑스 경제학자 피케티의 말이다. 대학생이던 나에게는 굉장히 충격적인 문장이었는데, 피케티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사회가 좀 더 평등해지길 바라고 행동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본가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일까?


나의 첫 직장, 은행에서 피케티의 말은 현실임을 목격했다.



위계를 중시하는 보수적이고 경직된 은행의 기업 문화는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자유'와 ‘평등’과는 거리가 멀었다.(지금은 많이 라졌다고 한다. 정말?) 이건 아니지 않냐고 말하는 모난 돌은 정을 맞기 일쑤였다.


실제로도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했다가 지점장한테 깨지기 일수였다. ROTC 반지를 끼고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지점장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팀장들의 책상을 발로 뻥뻥 찼다(요즘 이런 지점장은 없다고 한다). 맹랑한 신입이었던 나는 지점장에게는 발로 차지 못하는 눈엣가시였는데, 그는 나에게 발길질 대신 비난과 멸시의 말로 '이 구역의 대장은 자신'임을 수시로 확인시켜 주었다.


일개 신입 나부랭이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조직에 속한 이상 일단 열심히 일이나 하자. 모범생 인생을 살아왔던 나는 열심히 노오력 하는 것으로 번민을 극복하려 했다. 노력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노오력과 버티기 무한루프의 대가로 나는 매달 21일 월급을 받았다. 2009년 나는 이 돈을 차곡차곡 펀드에 넣었다. 그 중 매달 30만 원씩 넣던 펀드의 원금이 420만 원이 되었을 때 수익률은 20%. 수익만 84만 원이 되었다. 와우~. 새파란 신입에게 엄청나게 큰 돈이었다. 무려 20% 단순 수익률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은 신세계였다.


그런데 원금이 4000만 원인 고객의 계좌에는 수익이 800만 원. 당시 억 단위로 자산을 운용하는 vip고객은 불과 몇 개월 만에 신입의 연봉을 자본 소득으로 올리고 있었다. 내 계좌에 땡글땡글 알토란 같은 20% 수익 84만 원은 너무 작고 초라해보였다.


'토마 피케티. 당신의 말은 사실이었어요. 내가 은행 때려치우네 마네 혼자서 치열하게 내적 갈등을 하는 동안 자본가는 잠깐 사이에 제 연봉을 버네요.'


돈이 넉넉해서인지 vip들은 항상 여유가 있었다. 절대 재촉하는 일이 없었고 은행을 한 바퀴 돌며 직원들의 인사를 즐겼고 소파에 느긋하게 기대어 커피를 마셨다. vip 팀장을 세워놓고 자녀, 경제, 사회 등 가정 뿐 아니라 국가와 세계에 대한 지극한 염려를 토했다. 그런 이후에는 문 밖까지 팀장의 배웅을 받으며 아주 느린 걸음걸이로 은행을 나섰다.

 

머리 위로 전구가 켜졌다. 내가 더럽고 치사한 직장 때려치우려면 나의 갈 길은 자본가이다. 그렇게 나는 첫직장에서 탈출하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압구정 부자는 수익률보다 안정성을 본다.


학교 선배가 모 증권사 압구정 PB센터로 발령을 받았다. 직장에 갓 입사한 동기 선후배를 총동원해 신용카드를 만들어오라는 지점장의 특명이 내려졌다. 휴가를 내어 신용카드 신규 가입신청서를 들고 선배를 찾아갔다.  (일하러 가는데 나는 왜 휴가를 써야 했을까)

 

“여기에선 뭐 그렇게 많은 일을 하진 않아. 돈 많은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벌려고 안달하지 않는다는 거지. 지금 경제가 안 좋잖아. 채권에만 넣어도 수익률 4%. 10억이면 4천만 원이야.(한 금융사에 현금 10억을 예치한 고객이 어디 흔한가) 여기 고객들은 잃지 않는 게 중요하고 자녀에게 증여할 때 최대한 세금을 적게 내는 게 중요해.”


도깨비 시장 같은 전철역 앞 은행 지점에서 최대한 빠른 속도로 "다음 고객님"을 외치던 나는 아무도 없PB센터 응접실에서 새로운 세상을 발견했다. 이렇게 객장에 고객이 없어도 PB센터가 운영될 수 있는 것은 고객 한 명 당 센터에 가져다주는 수수료 수익이 크다는 것이다. 금융상품이 일반적으로 투자금에 대한 퍼센티지로 수수료로 챙긴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선배가 말한 10억은 예시에 불과하다. 실제 이곳의 고객들은 10억보다 훨씬 더 많은 금융자산을 이곳에 예치했을 것이다. 자본가가 되어 직장을 때려치우는 통쾌한 상상을 했었는데, 그 벽은 너무나도 높아 보였다.       




1억이란 돈을 제가 언제 모을 수나 있을까요?


“네 고객님 그럼 삼천만 원은 ELS에 넣으시고 삼천만 원은 1년 예금에, 사천만 원은 월 단위 예금에 넣겠습니다.”


클릭 몇 번으로 한 번에 몇 천만 원씩, 하루에도 수억 원씩 돈을 넣고 빼던 나는 어느 순간 돈에 무뎌졌다. 그저 하루 종일 계산하고 나누고 넣고 빼다가 마감 때 10원 한 푼 틀리지 않아야 하는 업무의 대상. 실제로잡을 수 없는 사이버 머니였다.


어느 날 3억 원을 예금에 넣겠다는 고객이 왔다.


“3억을 일반 예금에 넣는 건 너무 아까운데요. 예금 이율보다 물가 상승률이 더 크잖아요. 일부를 투자 상품에 넣는 게 어떠세요?”

“아, 언제 쓰게 될지 모르는 돈이라 그냥 예금에 넣어주세요.”


3억은 내게 큰돈이었고, 당시 예금 이자율은 4%, 지수연동형 ELS의 수익률은 10% 였다. 3억에 대한 4% 예금 이자는 1200만 원. 3억에 대한 10% 수익은 3000만 원. 고객은 예금에 돈을 예치함으로써 3000만원의 기회비용을 날리게 된다. 예금 이자 1200만원과 와 ELS 수익 3000만원은 무려 1800만 원의 차이가 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 문법을 배우고 있는 햇병아리 은행 계장은 그 1800만 원의 차이가 몹시 아까웠지만, 클릭클릭 빠른 손놀림으로 고객이 원하는 예금에 예치했다.


은행 마감 시간, 서류를 정리하면서 오는 현실 자각 타임. 이렇게 쉽게 클릭 몇 번으로 3억을 만지는데 나에게는 1억 조차 없다. 3000만 원의 기회비용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그냥 예금에 넣으라며 쿨하게 말하는 고객은 어떻게 이 돈을 모았을까?

 

“과장님, 저는 언제 1억이란 돈을 모을 수나 있을까요?”

신입 은행원은 잔뜩 울상이 되어 물었다.

“야, 그 고객 몇 살인데?”

“사십 몇 살이요.”

“야, 너 나이 몇 살인데?”

“스물 몇 살이요.”

“야, 너 사십 되려면 한참 멀었어. 그 나이 되면 1억만 있겠냐. 빨리 마감이나 해.”


정말일까? 나는 자본가가 될 수 있을까? 그래서 “치사하고 더러워서 더 이상 못해 먹겠습니다. 저 당장 내일부터 안 나오겠습니다.” 호기롭게 은행 문을 박차고 나올 수 있을까? 분명한 건 돈이 많으면 다양한 순간에 쿨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3억을 예금에 넣은 고객처럼 말이다.


'월급이요? 저에게 아주 작고 귀여운 것이지요. 전 그냥 자아실현을 위해 일하는 거예요.'(자본가가 되어 직장다니는 상상) 


그래! 사십되려면 아직 한참 남았다. 직장에서 달아나기 위해, 또는 쿨한 태도로 일하기 위해, 돈부터 모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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