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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요일 Sep 21. 2022

지금 바로 여기, 일상을 여행처럼

나 탐구생활

"현재를 즐기라"는 말은 너무 흔한 말이 되어버렸다. 데 이 말을 실천하며 살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쉽지 않다는 걸 알기에 많은 사람들이 되새기며 기억하려고 애쓰는 것 같기도 하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 짜증 나고 힘든 일이 늘 도사리고 있으니 현재를 즐기고 감내해야 할 축복이라고 생각하기 만무하다. 그래서일까? 우린 종종 술잔을 기울이며 세상살이의 고단함을 나누고 불평, 불만을 늘어놓는데 귀한 저녁시간을 쓰곤 한다. 아니면 지금 즐겁고 행복하다고 말해버리면 그 행복이 날아가버릴까 두려워서일까. 현재의 즐거움을 들키면 안 되는 일급비밀 이기라도 한 것처럼 지금 당장의 즐거움, 기쁨은 내보이지 않고 아껴두고 마음속에 조용히 혼자만 품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최근 갑작스럽게 허리디스크가 왔다. 올해의 남은 6개월은 온전히 내 건강을 챙기는 데 쓰기로 힘든 결정을 했다. 지난 8월 한 달은 지독한 통증과 기나긴 치료를 견뎌내며 정신없이 보냈다. 그러고 나니 어느덧 높고 푸른 하늘과 서늘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눈앞에 확 다가와 있다. 아, 여행가고 싶다.


나에게 여행이란 무엇일까? 문득 생각에 잠긴다. 집을 떠나 새로운 곳을 보고 일정기간 머물다 다시 돌아오는 것. 행선지가 멀면 멀수록 더욱 여행스럽다고 할 수 있겠다. 몸이 성치 않게 되니 집을 떠나는 여행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시간은 있지만 체력과 건강이 문제라 조금만 움직여도 쉬이 지치고 힘들어서 마음대로 다닐 수가 없다. 허나 길고 고된 치료를 이겨내고 건강을 회복하면서 움직일 수 있는 거리와 시간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요즘은 이 작은 변화가 새삼 고맙고 감사하다.


스스로 양말과 신발을 신을 수 있다는 것.

아침이면 선선한 바람이 덥지도 춥지도 않게 잠을 깨운다. 간단히 아침식사를 끝내고 나면 밝은 햇살이 살갗에 와닿는 느낌이 따스하다. 바깥공기를 마시고 싶다. 이제는 '산책이나 나가볼까' 하는 별것 아닌 결심에도 용기가 필요하게 되었다. 일상의 작은 일들을 아픈 몸으로 해내려니 아주 번거롭고 고된 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옷을 갈아입으려고 몸을 수그려 서랍장 문을 연다. 허리를 구부리니 허벅지 근육이 찌릿한다. 아차, 하며 다시 몸을 세운다. 양말을 신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먼저 침대에 걸터앉아 다리를 구부린다. 발이 들어갈 양말 입구를 벌린다. 그리고 양말에 발을 얼른 끼워 넣는다. 발목이 저린다. 잠깐 참고 두 짝을 챙겨 신으니 '휴~' 한숨이 난다. 마스크를 챙기고 비로소 현관문 앞에 선다. 지난밤 특별히 주문해 둔 신발잡이용 집게를 사용하여 운동화를 꺼내 발을 끼운다. '오~ 사길 잘했다.' 신발 정리하느라 허리를 굽힐 필요가 없으니 훨씬 편하다. 허걱, 허나 이게 끝이 아니다. 꺾인 신발 뒤축을 세워 발을 밀어 넣으려면 한번 더 몸을 구부려야 한다.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다리를 계단 위에 올려놓고 신발을 고쳐 신으니 대단원의 외출 준비가 끝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다. 1층 문이 스르르 열린다. 집 앞 세계로의 여행이 시작된다.

아파트 입구, 새로운 세상

1층 현관문이 열린다. 신선한 공기가 코로 훅 들어온다. 어제보다 더욱 짙은 아파트 가로수들이 긴가지를 늘어뜨리고 깊은 그늘을 선사한다. 몇 단도 되지 않는 계단의 난간을 잡고 천천히 내려온다. 그래도 붙들고 내려갈 난간이 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경사진 길을 걸어 내려와 아파트 입구를 나서니 햇볕이 뜨겁다. 지난여름, 신호등 앞 뙤약볕을 막으라고 설치해둔 그늘막 앞에 얼른 들어가 선다. 작은 그늘이라도 제법 시원하다. 신호가 바뀐다. 잰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넌다. 서둘러 걸어봐도 뛸 수 없으니 느린 발걸음에 파란불이 벌써 깜박인다. 마지막 두 칸을 남겨두고 빨간불로 바뀌어버린다. 신호를 기다리던 차가 휙 지나가지 않고 기다린다. 운전자의 느긋한 배려에 눈인사로 답한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데로~

이제는 약속시간이 잡히면 준비하고 나가는 시간을 예전보다 2배나 길게 잡고 움직인다. 그래도 움직임이 예전보다 느리니 시간이 빠듯해지기 일쑤다. 집 앞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버스가 지나간다. 이 버스는 내가 타야 할 바로 그 버스. 예전 같으면 벌써 뛰어가서 잡아탔겠지만, 욕심을 버리고 세월아 내월아 내 속도에 맞게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간다. 그런데 이게 웬일~같은 버스가 바로 뒤에 따라 나타난다. 전문용어로 일타쌍피의 행운이~ ㅋㅋ 좋다.


문득 불러도 바로 "콜!"을 외치는 그녀들

어느 좋은 가을날, 야외벤치에서 차 한잔 하고 싶은 날이 있다. 누군가 같이 즐거운 수다를 떨며 가을볕을 나눈다면 금상첨화겠지. 근처 친구들을 호출한다. "날이 너무 좋다. 차 한잔 같이 할래?" 즉시 "콜"이 돌아온다. 바로 지금 이 좋은 느낌을 나눌 누군가가 있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다. 동네 작은 커피숍에서 그녀들을 만난다. 커피 한잔, 수다 한참! 이런 즐거운 시간이 좋다. 그녀들은 자주 만나도 늘 다른 이야기를 쏟아낸다. 이야기 화수분이라도 있는 듯 전 세계, 전국의 맛집과 여행담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찌릿찌릿 찾아오는 통증에 길어야 겨우 1~2시간밖에 안 되는 이 시간이 어찌나 꿀맛인지.


이것저것 짐을 챙기지 않아도 된다. 무거운 캐리어도 필요 없다. 어딜 갈지, 무엇을 먹을지 컴퓨터를 붙들고 미리 계획하지 않아도 된다. 갑작스러운 질병으로 새롭게 발견한 우리 집 앞 짧은 산보를 나는 이제 여행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오늘 어떤 날씨 일지, 누굴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하고 어딜 갈지 당최 알 수는 없지만 손은 가볍고 설렘은 그대로다. 디스크 환자를 위한 맞춤 여행이라고나 할까. 내일은 과연 누구와 어딜 여행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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