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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요일 Mar 13. 2023

[북리뷰]덜 먹고 덜 일하고 덜 아픈 삶

[고스톱 고전 읽기] 월든 (7)

 갑작스러운 신장결석의 고통으로 지난 이주동안은 터널과 같은 어두운 시간을 보냈다. 진통제를 먹어도 듣지 않는 통증에 뱃속은 뒤틀리고 소화장애로 인해 쓰리고 울렁거림까지 더해져 실로 심각한 수준이었다. 결국 응급실엘 갔다. 이런저런 검사에도 원인을 모르다가 결국 CT촬영을 하고 발견된 결석, 요도까지 내려온 작은 돌멩이하나가 말썽을 일으켜 기어코 수술을 하게 되었다. 몸에서 사리인지 돌인지 모를 것들이 주르륵 나왔다고 의사는 작은 봉투에 몸 속에서 나온 돌을 포장해서 보여주는 친절함까지 보였다. 짧은 시간에 쓰나미처럼 몰아치는 질병의 공격에 이젠 조금 지친다.



나는 왜 많은 질병에 시달리게 되었을까?


소로우는 이웃 베이커 농장의 존 필드를 방문하고 그가 사는 모습을 관찰한다. 남들과 비슷하게 살아지는 데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많이 먹고 많이 일하고 많은 질병과 싸우며 살아가게 된다. 이런 모습에 소로우는 쓴소리를 던진다.


나는 차나 커피, 버터나 우유나 육류를 먹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하여 힘든 노동을 할 필요가 없다는 점 그리고 중노동을 하지 않으니 대식을 할 필요가 없고, 그리하여 식료품 값으로 아주 적은 돈만을 지출한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는 기본 식량이 차, 커피, 버터, 밀크와 소고기이므로 그것들을 얻기 위해 중노동을 해야 하며, 중노동을 하면 신체의 소모된 부분을 보충하기 위하여 다시 대식을 해야 한다는 점, 그러니 결국은 마찬가지인 것 같지만 그가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데다 몸까지 축내고 있으니 실은 손해라는 점을 이야기했다. (309p.)


더 많은 것을 욕심내니 더 많이 벌어야 하고 더 많이 피로하고 피로가 쌓이니  많은 질병이 되지 않았까. 나는 무슨 욕심을 부렸을까. 무엇을 더 잘하려고 애썼을까. 공부하고 가르치는 게 재밌었고 함께 성장하는 것이 좋았다. 더 많은 사람과 더 많은 모임에서 나를 썼다. 재밌고 신났지만 몸이 축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미래의 에너지까지도 끌어다 쓴 셈이다.



밥벌이를 그대의 직업으로 삼지 말고 도락으로 삼으라. 대지를 즐기되 소유하려 들지 마라. 진취성과 신념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이 지금 있는 곳에 머무르면서 사고팔고 농노처럼 인생을 보내는 것이다. (312p.)



 밥벌이를 직업으로 삼지 않고 도락으로 삼으며 살았. 그렇다 해도 체력이 축나고 내 몸, 건강을 돌보지않고 함부로 쓰니 결국 병약한 몸이 되었다. 그 좋은 밥벌이도 제대로 즐길 수도 없게 되었다. 미련했던 나.


바쁜 일상 속에 외면했던 내 몸


바쁜 일상 속에 내 몸을 돌보고 좋은 것을 챙겨 먹고 맛을 음미하는 시간은 없었다. 일하고 아이들을 돌보는 최소한의 중요한 미션을 수행하기에 급급한 상황 속에서는 자연에서 얻어온 신성한 생산물을 고르고 정성스레 조리하는 과정은 사치에 불과할 뿐. 냉장고에는 마트나 온라인 장보기서 공수한 인스턴트와 밀키트가 점점  늘어가고 대충 빨리 때우는 먹거리로 식탁은 채워져 갔다. 서두를 것도 없는 주말에도 빠르게 쉽게 뚝딱 한 끼를 해치우고 편히 쉴 곳만을 찾아다녔다.


이렇게 내 몸은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 무관심 속에서 서서히 시들어갔다. 먹는 시간, 쉬는 시간도 경계가 없이 섞여서 엉망진창으로 바쁘게 뛰어다니던 시절, 나는 병을 하나씩 키워가고 있었던 거였다. 몸이라는 신성한 창조물을 홀대했던 시간이 겹겹이 쌓여 때론 디스크로 때론 암으로 때론 결석으로 내 몸이 아파했다.



우리의 상상력을 거스르지 않을 소박하고 깨끗한 음식을 마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육체에 먹을 것을 줄 때 상상력에도 먹을 것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323p.)



먹는다는 것은 먹거리를 소비하고 허기를 채우는 원초적인 목적보다도 가족이 한 곳에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근황을 전하는 여유로운 시간으로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그간 고단했던 사회생활의 어려움을 나누며 공감받는 우정의 시간이기도 하다. 이런 공감과 상상력에도 자리를 내어주는 식탁이 필요했던 것이다.



식욕과 상관없는 식사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만족감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나는 정신적인 지각이 천박한 미각에 힘입고 있다는 점, 내가 미각을 통하여 영감을 얻어왔다는 점 그리고 언덕에서 따먹은 산딸기가 나의 천재성을 키워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전율을 느낀다.

 공자는 "마음이 자체를 거느리지 못하면 보아도 보이지 않으며,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모른다."라고 말했다. 음식의 참다운 맛을 아는 사람은 폭식을 하지 않으며, 그 맛을 모르는 사람은 폭식가임을 면할 길이 없다.(327p.)


 맛 대신에 양으로, 음미대신에 먹어치움으로, 건강한 재료 대신에 자극적인 소스로 채워진 음식들이 내 몸의 신성한 시스템을 방해해 왔었나보다.

 

내 몸이라는 위대한 예술작품


각자는 육체라고 불리는
신전의 건축가이다.
이 신전은 자기 나름대로의 양식에 의해 건축되며 자기가 숭배하는 신에게 바쳐진다. 이 육체 대신 대리석 신전을 지음으로써 빠져나갈 수는 없다.
우리는 모두 조각가인 동시에 화가이며, 우리 자신의 피와 살과 뼈를 작품의 재료로 쓴다. 어떤 사람의 내적 고귀성은 즉각적으로 그의 겉모습을 정교하게 만들기 시작하며, 비열함이나 관능은 그를 짐승처럼 추하게 보이도록 한다. (332p.)


아이를 임신하고 키우고 낳는 과정을 보면 인체라는 것 자체가 고귀한 생명을 키우고 낳게 하는 대단한 유기체이며 신적인 건축물임을 게 된다. 내가 생명을 키우는 성전이 된다는 사실자체가 놀랍고 신기하다. 날카로운 종이날에 손이 베면 피가 나고 쓰린 통증에 깜짝 놀랐다가 며칠 후면 아물고 깨끗해져 그 고통을 금방 잊곤 한다. 놀라운 복원력이다. 인체의 신비는 이렇게 아주 사소한 것에도 깃들어 있다. 우리의 살과 뼈가 아주 작은 난자와 정자의 결합으로 시작되어 완벽한 인체라는 구조물이 되는 과정 자체가 예술가의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존경심으로 나를 대한다면


나를 걱정하는 지인들은 나를 위로하며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곤 한다. 예전과는 달리 위와 대장 운동까지도 잔뜩 위축된 나는 많은 음식을 소화하기도 힘들다. 그것을 알면서도 선뜻 노!라고 말하지 못한다. 덜 자극적인 음식으로 조금 덜 먹는 방법으로 그들의 선의를 받아들이고 소중한 관계를 이어간다. 먹고 마신다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에너지를 주는 것 이외에 참 많은 것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기에.



"그대는 어째서 이곳에 머물면서 이런 천하고 힘든 생활을 하는가? 영광스러운 삶을 살 수 있는데도 말이다. 저 하늘에 있는 별들은 여기 말고 다른 들판 위에서도 빛나고 있느니라." 그러나 어떻게 이 환경을 벗어나 실제로 그리 이주할 것인가?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새로운 금욕 생활을 실천하며, 그의 정신으로 하여금 그의 육체 속으로 내려가 육체를 구원하며, 점점 커지는 존경심으로 스스로를 대한다는 것이었다.(333p.)



내 욕망을 살피고 내면을 돌보는 일 외에 내 몸을 잘 추스르는 고귀한 일을 잊고 있었음을 뒤늦게 고백한다. 그 많은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을 하느라 내 몸에 동의도 받지 않고 쉼 없이 움직였던 시간이 고스란히 질병으로 돌아와 내게 잘못을 묻고 있다. 왜 그랬냐고. 머리가 쉬고자 했으나 몸이 쉬지 못했던 시간이 있었고 몸이 쉬었으나 머리가 쉬지 못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뭐가 그리 급하고 뭐가 그리 하고 싶었을까. 나 스스로를 존중하지 못하고 돌보지 못한 나를 인정하고 내 몸을 쉬게 하는 어색한 요양이라는 시간으로 내 몸에게 사죄를 구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앞으로는 내 마음, 그리고 내 몸과 대화하는 시간을 갖고, 덜 먹고 덜 일하고 덜 아픈 나, 나를 존중하는 내가 되기를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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