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저녁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더니 아침부터 몸이 축 늘어진 우거지처럼 기운이 없다. 어그적 어그적 집 앞 내과에 가서 당뇨약 하나 받아오고 침대에 또 누웠다. 그리고는 예약해 둔 짚 앞 미용실에 겨우 걸어가서 커트를 하고 왔다. 그리곤 계속 뒹굴거린다.
당뇨와 디스크가 있는 환자는 큰지병을겪는 것도 아닌데도 종종 알 수 없는 피로감이 덮쳐 만사가 귀찮아지는 느낌을 겪곤 한다. 하지만 맘 편히 하루종일 누워만 있을 수도 없는 고약한 질병이기도 하다.밥을 좀 전에 먹었는데도 금세 배가 고프고 허기지고 또 금세 피로해진다. 그러나 피곤하고 허리가 아프다고 아무 때나 누울 수도 없다. 당뇨는 운동이 꼭 필요한 질병이라 밥 먹고 나른해져 딱 10분 누워있고 싶어도 참고 좀비처럼 이라도 움직여야하는 법. 무거운 몸을 일으켜 산책도 하고 러닝머신도 해본다. 20~30분이라도 이렇게 움직이고 나서야 잠시 누울 수 있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하루 세끼, 밥하고 먹고 움직이고 눕고 이런 루틴을 세 바퀴 돌리고 나면 하루가 지나있다. 가끔 누워서 책도 보고 라디오도 듣고 친구랑 통화도 한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 할 게으른 일상이지만 이런 루틴이 나에게 딱 맞는 강도의 일상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그런데 오늘은 이 마저도 하기 싫다. 전화벨이 울린다. 막내딸의 목소리~
엄마, 오늘 비가 와서요. 친구들이랑 집에서 놀아도 돼요?
"응. 그래!" 대답하기가 무섭게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들어온다. 학원 가기 전까지 약 40분 놀 수 있다. 가만히 안방에 누워 애들이 뭐 하고 놀고 있나 귀기우려 들어본다. 10분은 뭘 하고 놀지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면서 보낸 것 같다. 그 후 15분은 산타클로스가 있는지 없는지 진지하게 토론하느라 시간을 보내더니 나머지 15분은 뭔가 게임하나를 겨우 정해서 한다고 3~4명이 우당탕 뛰어다니며 한창 재밌게 놀다가학원 시간이 됐다고 금세뿔뿔이 흩어진다.
그 사이 나는 애들 간식이라도 내어볼까 하고 천천히 일어나 본다. 방울토마토를 씻어내놓고 감자전이나 해볼까 감자를 씻어 강판에 열심히 갈아보는데 팔 힘도 빠졌는지 힘에 부친다. 포기하고 싶을 즈음~감자전 반죽도 미처 다 못했는데 애들은 가고 없다. 공친 하루다.
뭐 하나 손에 잡히지 않는 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그런 날이 있다. 그래도 공친 하루가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닌 것이 멍한 여백으로 아이들의 투닥거림도 들을 수 있고 아랫집의 층간소음을 알리는 인터폰 소리도 들을 수 있고 창문 너머로 하루 온종일 들락거리는 공사판 덤프트럭 삐삐~소리도 하루 종일 들을 수 있다. 게다가 좀 더 고요히 잠자코 있다 보면 까치 소리인지 까마귀 소리인지 알 수 없는 동물들이 내는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다.
<알사탕>,백희나, yes24캡쳐
속이 시끄러워 아무런 의욕도 찾을 수 없어 집에서 뒹굴거리는 날, 빗속에 소음들이 너도 나도 살아나서 내게 말을 거는 신비한 경험을 하고 말았다. 백희나의 그림책 <알사탕> 이야기에서처럼 여태 듣지 못했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알사탕이라도 먹게 된 걸까. 공친 하루의 일상 속으로 들어온 그간 듣지 못한 이야기들이 새삼 새로운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