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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요일 May 30. 2023

계란은 깨지고, 바위는 그대로

<중년의 진로수업>

병원에 민원을 제기했었다.


https://brunch.co.kr/@blume957q7n/217


전신마취의 부작용에 대한 설명이 없었던 점, 마취 이후 깨진 이빨에 대한 대응 미숙과 차아치료에 보상을 요구하는 민원을 병원에 냈고 답변이 왔다. 내용이 아주 기가 막히다.

마취통증의학과 답변을 받아 회신드립니다.

먼저 치아 손상에 따른 불편함이 생기게 된 점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통상적으로 전신마취가 되면 의식 소실에 따른 호흡 억제로 모든 환자들이 기관 튜브삽관을 받게 됩니다. 마취 유도 중에는 환자분들이 의식 소실과 근이완이 충분히 된 상태에서 기관 삽관을 하지만, 마취 종료 후 자발 호흡을 되돌리며 기관 튜브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환자분들께서 무의식 중에 튜브를 꽉 깨무는 경우 호흡이 이루어지지 않아 저산소혈증 및 심혈관계억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때 호흡을 유지시키며 발관을 하는 과정에서 본인 치아가 아닌 경우(임플란트, 라미네이트, 브릿지 등), 흔들리는 치아가 있는 경우 치아가 손상되는 일이 종종 발생합니다. 이에 전신마취 동의서 작성 시 치아손상 가능성에 대한 내용을 명시하고 있으며, 치아손상이 발생된 경우 마취 회복실에서 설명을  드리게 됩니다.

**님의 경우, 전신마취 동의서에 서명을 하셨고, 마취 종료 후 회복실에서 거울을 보여 드리며 손상된 치아와 마취 회복 과정에 대한 설명을 드렸습니다만 마취 회복실에서는 잔료 마취제의 영향으로 설명 당시는 수긍하셨으나 병실로 퇴실 후 기억이 안 나셨기에 불만족스러웠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전신마취 동의서 상에 마취의 단점(위험성/합병증의 종류와 발생 가능성) 설명에서 치아의 경우 의치, 치주염, 치관 및 치근불량이 있을 경우와, 수술 후 무의식 상태에서 적절한 호흡유지를 위한 기구를 강하게 물 경우 치아가 부러지거나 심하게 흔들리거나 발치될 수 있음을 설명하고 동의 서명이 된 점을 고려할 때 요구하시는 치료와 보상은 안타깝지만 어려운 것으로 안내드립니다. 병원에서는 ***님의 의료적인 문제나 어려움을 충분히 공감하며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에 다시 한번 진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드리며, 오늘도 평안한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병원 원무팀



이것은 한 편의 소설이자 드라마였다.


**님의 경우, 전신마취 동의 마취종료 후 회복실에서 거울을 보여드리며 손상된 치아와 마취 회복 과정에 대한 설명을 드렸습니다만 잔료 마취제의 영향으로 설명 당시는 수긍하셨으나 병실로 퇴실 후 기억이 안 나셨기에 불만족스러웠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마취동의서를 사전에 설명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내 의견 따위는 언급도 대답도 하지 않고 무시했다. 게다가  마취도 안 깬 사람한테 손상된 치아를 거울로 보여주고 설명했다고?? 전혀 기억이 없는데. 마취도 안 깬 사람에게 그걸 설명하는 게 맞나?  와. 진짜 ~! 고구마 100개 먹은 것 같다. 상식적으로 그런 사실을 마취가 덜 깬 환자가 아니라 보호자에게 연락을 해야 맞지 않나. 보호자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런 연락을 취하지 않은 것 또한 말이 안 된다.


100번을 말해도 100번 똑같은 답이 올 것이다.

또다시 부실한 답변에 대한 민원을 조목조목 따져 적어 보냈다. 그래도 분이 안 풀려 아는 지인을 통해 동일 대학병원 다른 지역에 있는 수술실 간호사에게 이번 일에 대해 물었다. 그분은 아마도 100번 민원을 넣어도 100번 모두 같은 답이 나올 거라고 했다. 와, 진짜 답이 없다. 진짜 사람하나 잘못되어도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동의서 한 장이면 모든 잘못을 면할 수 있는 거구나. 분하고 화가 난다.


제대로 읽지 않고 사인 한 내 잘못을 인정하더라도.

병원은 이렇게 대응하는 것이 최선인가. 깨진 이빨에 대해 마취도 안 깬 환자에게 설명했다고 말하면 끝인가. '그래. 깨진 이빨은 속상하지만 어쩌겠니?  네가 여기에 사인을 했는걸.' 이런 태도로 약 올리듯 민원에 대해 못 이기는 척 최소한의 조치만 취하고 있다. 참 억울한 사람이 많겠다.


이렇게 기득권의 막강 권력이 유지되는가.

종이 한 장에 윤리의식도 책임의식도 다 팔아치우고 알파고가 쓴 것 같은 말도 안 되는 답변서 한 장으로 일을 처리해 버렸다. 어디 설명을 제대로 못 듣고 서명한 사람이 나 혼자 뿐일 것이며 억울하게 이빨이 깨지거나 신체에 불필요한 상처를 입은 사람이 나 혼자 뿐일까.


비슷한 의사가 재탄생된다면

걱정되는 건 아직 정식 전문의도 되지 않은 인턴이라는 사람이 계속 휘리릭 휘리릭 넘겨며 설명 따윈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며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 무성의한 태도가 바뀌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긴장감이나 책임감 없이 설렁설렁 환자를 대하는 의사가 되고 그 사람에게 나, 혹은 주변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암담한 사실에 짜증이 난다.


나 하나만 손해 보고 내 실수라고 인정하고 넘어갈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작은 실수가 누군가에게 심리적 억울함을 주고 신체에 불필요한 손상과 경제적 손실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아야 하는데 그걸 확인시켜 줄 수 없어 답답한 마음이 든다. 실은 그걸 몰라서 안 하는 건 아닐 텐데도 괜한 오지랖과 공명심이 발동한다.


어쩔 수 없이 포기한 사람들의 억울함

 수많은 사람들의 억울함과 심리적 피곤함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어쩔 수 없이 포기한 민원들위에 의사나 소위 권력층의 나쁜 습성이 유지되고 있는 건 아닌지 씁쓸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아픈 환자는 언제까지나 약자고 의술을 가진 의사는 언제나 강자인가. 그들이 만든 규칙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고 환자는 고발할 권리도 없는 것인가.


문득 내가 편하게 누리는 권리가 누군가의 억울한 사연을 딛고 누리고 있는 건 아닌지 새삼스러운 반성도 하게된다.


끝까지 계란으로라도 바위 치고자 했던 다짐은 현실의 벽에 부딪혀 앞으로는 읽지 않은 동의서 서명하면 안 된다는 쓰디 쓴 교훈을 반강제적으로 얻고 전의를 잃게 됐다. 그러나 그들이 옳기 때문에 그들의 답변이 충분히 납득가능해서 물러서는 것은 아님을 이렇게 남겨 확실히 해두기로 했다. 그들에게는 1의 타격도 안 느껴지겠지만, 또 한 개의 계란이라도 던지고 싶은 마지막 발악같은 것이다.


사람들이 자꾸만 까탈스러워지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이 억울함을 잊지 않을 것이다. 어리숙하게 그들이 하라는 데로 하고 그들을 100% 믿는 바보 같은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더 까탈스럽게 더 깐깐해져야겠다. 그렇게 따지는 것만이 나의 권리와 건강을 지키는 것임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언제든 그들의 불합리함에 눈에 불을 켜고 묻고 답을 받아낼 것이다. 호락호락해지지 않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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