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담임 업무를 하지 않는 엄청난 배려를 학교서 받고 그저 평범한 일상업무만을 하고 있는데도 분명 예전과는 다르다.
버벅거리는 나.
교사들은 기본적으로 각자 맡은 교과 수업을 준비하고 진행하고 평가하는 일을 한다. 이외에 행정적인 일이나 담임업무 중 하나 더 맡아한다. 내 일은 영어를 가르치는 일과 시험을 치르는 평가 관련업무이다. 이 말뜻은 내가 맡는 학년 시험문항출제 이외에 전체 평가에 관련된 모든 일을 맡아야 한다는것이다. 하지만 다른 건 다 제쳐두고 수업을 열심히 하는 것, 그 한 가지에 내 에너지용량을 다써버리고 말았다. 안타깝게도 수업이외에다른 일을 할 힘이 좀처럼 생기지않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당황스럽다.
교사의 평가문항 개발은 그 전문성의 수준을 만천하에 보여주는 고도의 지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순수 창작활동이다. 그만큼 공이 많이 들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사소한 오류나 실수 하나에도 아이들의 점수가 오락가락하기 때문에 아주 민감하고 힘든 업무 중하나이다. 지난주 내내 평가문항을 만들고 편집하는 데 예전 같지 않다. 평소의 나는 어느 날, 갑자기 문제출제의 영감을 주는 접신이 되는 순간, 긴 호흡으로 후루룩 출제하고 계속 수정, 보완하곤 했다. 이번에는 다르다. 어느 순간, 머리가 딱 막힌 듯 어느 순간 뇌가 정지해 버리니 무척 당황스럽기만 하다. 아이들의 이해력과 사고능력을 자극하는 좋은 훌륭한 문제를 내고 싶은 데 그게 잘 안 되는 것이다. 며칠에 걸쳐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거의 다 출제했는다 마지막 한 두 문제에서 길이 딱 막혀 버렸다. 아무리 고치고 수정해 봐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짧은 호흡, 자꾸만 멈추는 나는 누구?
가만히 생각해 본다. 내가 평가문항을 내본 지 얼마나 되었나. 2년 만이다. 그래서였다. 교사 본연의 일에 전원이 다시 켜진지 얼마 안돼서 아직도 버퍼링 중인가. 길게 일을 쭉 이어서 하지 못하고 뇌가 멈추고 몸이 멈추는 일이 잦아지게 되었다. 한 시간 일하고 멈추고 두 시간 일하고 잠시 눕고 퇴근하면 몰려드는 피로감에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고. 다행히 한 시간 남짓 몸의 구석구석에 침을 꽂고 치료를 받고 나면 에너지가 조금 충전된다. 힘을 내서 집에 가서 저녁을 챙겨 먹고 운동하고 잠깐 누웠다가 다시 평가문항지를 들여다본다. 출근 전 새벽에 한 번 더 보고. 이렇게 며칠 동안 문제와 실랑이하다 보니 머리가 띵. 눈은 꽹~섞은 동태눈이 되어버렸다.
내 삶에 누군가 시고 쓴 레몬을 건넨다면
패트리샤 폴라코의 <The Lemonade Club>을 다시 펼쳐보게 되었다. 다정한 위첼만 선생님과 트레이시, 마를린 제자 두 명 사이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다. 백혈병(Leukemia)에 걸린 마를린이 유방암에 걸린 선생님 위첸만과 서로 위로하고 응원하며 결국 병을 이겨내는 따뜻한 이야기다. 아이들을 유난히 사랑했던 위첼만선생님은 교실 앞에 있는 레몬을 들고 아이들에게 말한다.
"삶이 그대에게 레몬 한, 두 개를 건넨다면 그냥 물이랑 설탕을 넣고 뭐를 만들면 되죠??"
반전체 아이들이 외친다. "레몬네이드요!"
달짝지근한 레모네이드나 만들어볼까.
삶에서 고난이라고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면 무엇을 하면 좋을까. 그 문제를 분석하고 고민하고 해결방법을 찾아서 이성적으로 해결하는 것도 좋지만, 위첼만선생님은 다른 해결책을 알려준다. 고난을 재료로 뭔가 맛나고 재밌는 걸 만들어보라고. 달달한 것을 첨가하고 무색무취의 것을 추가해서 보기 좋게 위기를 요리해서 넘겨버리라고. 유쾌한 삶의 지혜에 무릎을 탁 친다.
생각해 보면 문제를 쥐고 고민하는 것보다 때로는 새로운 요소를 첨가하거나 뭔가 달달한 경험을 해서 잠시 잊어버리면 어느 순간 새로운 영감이 떠올라 문제를 해결할 때도 종종 있었던 것 같다. 위첼만 선생님은 레몬과 레모네이드의 비유로 고난을 넘기는 비법을 재밌게 학생들에게 알려주었다.
긴장도가 최고조인 지필평가. 한 치의 실수도 허락지 않는 평가문항 출제의 스트레스를 나는 어떻게 풀어내 볼 것인가. 일단 주말엔 푹 쉬고 친구, 가족들과 시험문제를 까맣게 잊고 신나게 놀아보기로 했다. 그러다 보면 지치지 않은 새로운 눈이 되겠지. 새로운 에너지로 각성된 눈은 새로운 영감을 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아주 신박한 문제의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까. 평가문항 개발이라는 부담스러운 신 레몬에 무색무취 일상의 물을 타고 달달한 휴식의 설탕을 첨가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