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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요일 Sep 18. 2023

저를 추천합니다.

중년의 진로수업

지역사회 유공교원 추천하실
분 연락 주세요.
(손을 번쩍!)
저를 추천합니다.


시청에서 공문이 왔다. 지역 내 교원 중에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애쓴 사람을 추천받는다고. 아침에 공문을 봤는데 마감은 그날 정오까지. 이건 뭐 추천은 무늬만 하겠다는 인가. 아니면 내정자가 있다는 건가. 괜한 오기에 반항심도 발동해서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하고 번쩍 손을 들었다. 당돌하게 보일진 모르겠지만.


나를 추천하는 낯부끄러울 수도 있는 일이 나는 별로 창피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진짜 지역사회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기 위해 애를 썼고 긴 시간 봉사를 해왔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지만 나는 그냥 두 손 들어 열심히 내가 했다고 손을 들어버렸다.


자기만족으로는 부족했다.

보이는 것보다 늘 더 많이 더 오래 준비하고 애쓰는 타입이라서 그랬을까. 어떤 일을 잘 끝내놓고도 허탈감이 들 때가 많았다. 그냥 "수고했다"라는 말로는 부족한. 진심으로 열심히 어떤 일을 끝내고 나면 마음에 휑하게 큰 구멍이 난 것만 같았다. 이런 나의 허탈함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원체 겉으로 힘든 내색을 하지도 않기도 하고 일을 하는 과정에서는 힘들다고 말하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상을 하나 더 받으면 이런 나의 수고를 남이 알아주기나할까. 그저 상이 좋다기보다는 남모르게 혼자 속앓이 했던 세월에 대작은 보상이 되었으면 하는 나만의 바람이 아닐까.


나는 왜 이렇게 애를 쓰며 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떤 결핍에서 나온 행동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때때로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한 일을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인정해 주고 지지해 준다면 내가 이렇게 허울만 좋은 상따 위에 연연했을까. 관례적으로 하는 일이고 적당한 지역인사에게 돌아가는 상이고 종이조각뿐일 텐데 그걸 받아서 뭘 한다고. 나는 왜 그까짓 종이조각까지 챙기려이렇게 애를 쓰고 있나. 


어릴 적 나는 혼자 공부하고 장학금을 찾아다니고 돈을 덜 들이고 어학연수할 수 있는 봉사활동을 하며 내가 가질  수 없는 기회를 만들고 잡으려고 발버둥 쳤다. 아이넷 밥먹이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부모님께 그 이상은 바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지원한 대학에 모두 붙고도 가장 등록금이 싼 학교로 등록했다. 가난을 원망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늘 내가 찾지 않으면 가질 수 있는 것이 없었고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변화는 없었다. 어느 날, 문득 아등바등 애쓰고 사는 내가 불쌍해 보이기도 한다.


감정표현은 어리광이라고 생각했던 나.
좋고 싫고 신나고 재밌다는 표현조차 쉽지 않았다. 그런 어린아이 같은 말들은 늘 동생들 몫이었다. 맏이인 나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보다는 숨기고 참고 인내하는 법을 먼저 배웠다. 묵직하고 강하게 시련을 이겨낼 강인함은 얻었지만 작고 소소하게 삶의 재미를 만들어내는 소프트웨어는 나에겐 어색하고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도 때론 울고 싶고 투정도 부리고 싶고 '나 잘했지?' 라며 칭찬받고 싶었던 것 같다. 어른스럽고 착한 아이라는 칭찬이 나를 속이는 이상한 애어른을 만들어내고 만 것이다.


이제 그만 애쓰고 싶다.

그냥 편하게 돈 걱정 없이 즐기고 싶고 안 되는 걸 노력해서 찾아내고 기회를 얻어내고 싶지 않다. 가진 것이 많다면 그냥 내가 가진 것을 걱정 없이 쓰고 누리며 살고 싶다는 바보 같은 상상을 하곤 한다. 가난이 준 선물이었던 생활력도 건강이 약해지자 그 마저도 놓고 싶은 심정이 되어버렸나.


 열심히 공부만 하면 가질 수 있는 안정적인 을 찾았고 그것은 교사였다. 딸 넷의 맏이로 자란 터라 아이들을 가르치고 복작이는 애들 틈에 생활하는 건 내게 편하고 재밌는 일이었다. 가까스로 교사가 되었고 아무것도 없이 시험을 준비하고 사회생활을 하고 결혼을 하고 가족을 이루어 잘 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내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은 늘 어려운 일이다. 문득문득 나도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고 아무렇게나 투정도 부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실은 돈 몇 푼보다 내가 절실히 필요했던 건 큰 산 같은 버팀목이었고 내 모든 것을 품어주는 어떤 존재가 아니었을까.


 "애썼다. 고생했다"라는 말 한마디.

그 흔한 말 한마디가 내겐 필요했다. 큰 일을 마치고 힘없이 혼자 돌아오는 쓸쓸한 뒷모습에 "밥 먹으러 가자"하는 어떤 사람. 세상 속에 치이고 상처받고 혼자서 끙끙 앓다 잠들면 지긋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어떤 사람. 사람들 앞에서 늘 더 크게 더 강한 역할만을 했던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행동이나 말을 해주는 역할만을 했었지 나에게 그런 말을 해주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아마도 그들은 내게는 그런 말은  필요치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사람들 안에서의 역할과 내 안의 감정의 부조화는 번아웃이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불이 나게 서류를 제출하고는

내가 왜 그랬을까 고민에 빠져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변명 아닌 변명을 적고 있다. 이 상을 받으려고 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이 상이 적합한 사람에게 가지 않고 엄한  사람. 욕심 많은 그 누군가의 손에 쥐어지는 것은 싫었다. 차라리 무모하리만큼 진심이었던 내가 그 상을 받는 게 낫지 않나 하고 합리화했다. 그리고 나라도 인정해주지 않으면 애쓴 세월이 너무 초라할까 봐. 나를 추천하는 이 일이 비굴함이 아니라 나 스스로를 인정하는 당당함이라고 합리화하며 가 묻지도 않은 자기 추천의 이유를 이렇게 기다랗게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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