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화요일 Sep 19. 2023

늘어난 티셔츠

<중년의 진로수업>

퇴근 후 나의 일상은 물먹은 스펀지처럼 쭉 가라앉아 있다. 누구와 말을 하기도 싫고 뭔가를 하기도 읽기도 싫은 그저 내 몸에 필요한 최소한의 에너지만을 사용하고 싶은 한없이 게으르고 싶은 시간.


현관문을 박차고 들어와

몸에  걸친 그 모든 것과 나를 분리한다. 목걸이, 귀걸이, 반지, 겉옷 등... 사회생활이라는 것을 하지 않았다면 필요치 않을 거추장스러운 것들. 훌훌 털어내고 도망치듯 욕실로 들어간다. 손바닥 가득 클렌징크림을 짜내 얼굴 구석구석에  바르고 박박 문대 닦고 씻어낸다. 내 안에 숨어있던 아기피부라도 다시 나타나길 바라는 걸까. 습관처럼  꼼꼼하게 씻고 또 씻는다. 아기피부는 모르겠고 어느새 상쾌한 기분이 들어 좋다. 그리고는 제일 편한 옷을 걸친다. 목이 늘어날 데로 늘어나서 몸을 끼워 넣어도 막힘도 없고 힘도 필요치 않는, 긴장도 쪼임도 주지 않는 원초적 편안함. 아, 좋다. 대충 입고 침대에 대자로 눕는다. 이제야 완전히 자유로운 가 된다.


매일 죽었다 다시 깨어나는 것처럼

매일 저녁 나는 주체할 수 없는 피로감에  까무룩 죽었다 다시 깨어나는 것만 같다. 잠들 때면 목이 잔뜩 늘어난 티셔츠 속에 쏙 들어가 쉬고 아침이면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다. 맨 몸에 가까운 상태로 최소한의 것만을 걸치고 가장 편한 상태에서 최상의 휴식을 누린다. 그런 면에서 잠 잘때는 가장 부드럽고 축 늘어나 멋이라곤 도대체 찾아볼 수 없는 오래된 티셔츠가 최고다. 단단하고 각 잡힌 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그 태초의 편안함. 오래된 티셔츠만이 주는 그 무언가가 있다. 누구에게나 이렇게 원시적 안식을 주는 애착물은 하나씩 있지 않을까. 스누피에겐 담요가 있었던 것처럼.


Snoopy & his blanket


또다시 애착물 속으로

오늘밤도 익숙한 티셔츠를 입고 눕는다. 바깥 세상살이의 부속물들을 떨쳐내고 본연의 내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는 의식이라도 시작하려는 듯 온몸에 힘을 빼고 흐물흐물한 상태의 나를 만든다. 이제야 온전한 내가 되는 시간. 무념무상의 상태, 나른한 피곤함에 기분 좋게 잠을 청한다. 때때로 날아드는 모기소리에 신경질적인 손사래도 쳐보지만 소용없다. 고요한 저녁공기 속에 나를 맡긴다. 오늘도 변함없이 껌딱지처럼 내게 붙어있는 막내의 살냄새가 정겹다. 아마도 막내에게도 내 티셔츠가 애착물이 아닐까. 옅은 미소가 번진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애착할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태고의 편안함을 느끼며 스르르 눈을 감는다.


오늘 밤도 잘 부탁해. 내 오래된 잠친구.
매거진의 이전글 저를 추천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