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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요일 Sep 29. 2023

취향존중 대참사

<중년의 진로수업>

선생님, 책을 많이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남편이랑 자꾸 싸우게 돼요.

아, 저도 그래요. 왜 그럴까요?


지난 독서모임 워크숍에서 친한 샘이 고민을 털어놓는다. 실은 나도 그렇다. 책을 읽고 세상지식과 지혜가 쌓이고 논리적인 말과 글에 익숙해질수록 세상의 불완전한 것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한다. 가벼운 말 한마디도 그 논리와 가정을 추론하게 되고 세상에 흔히 깔려있는 고정관념이나 편견에 의한 싱거운 말에도 파르르 떨게 된다.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가까운 가족에게는 더욱 그런다. 벼는 익을수록 머리를 숙인다는데 나의 어설픈 지성은 익을수록 더욱 예민하고 꼿꼿하게 세상 자극에 반응하곤 한다. 왜일까?



투머치 진지, 노땡큐고요.


엄마는 내가 그냥 장난으로 한 건데,
 왜 그렇게 진지해요?



우리 큰 딸의 말이다. 사춘기 아이의 말이라 가차 없다. 좀처럼 말을 안 하는 큰 딸이 오래간만에 어색하게  마디 떨구고 갔는데 내가 발끈하고 말았다. 매사에 진지해져서 큰 일이다. 뭐 하나 쉽게 흘려듣 없다. 타자의 말과 행동이 그 사람의 생각을 파악하는 매우 중요한 단서로 있는 그대로 내 안에 차곡차곡 쌓이기만 다. 매번 이런 식이다 보니 같이 사는 사람들은 힘들긴 하겠다. 잠깐 떨어져 보면 반성은 면서도 쉬이 고쳐지질 않는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어설프게 각성된 머리가 엉뚱한 곳에 부작용을 낳고 있나 보다.


문득, 이런 성향이 일종의 직업병과도 연관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학교에서는 하루에도 수십 명의 아이들을 만나곤 한다. 복도에서 만나는 아이들의 인사하는 목소리와 눈빛, 교실에서 앉아있는 태도나 분위기 하나에도 많은 것을 읽어내고 즉시 반응해야 하는 직업적 사명을 띠고 있는 것이 교사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사람의 심리와 행동을 읽는 책이나 철학서를 보고 나면 그의 행동과 말을 즉시 연관 지어 자동반사적으로 그 사람의 현재 상태를 파악하곤 한다. 이런 성향이 학교에서는 긍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해서 우울감이나 공격성향을 가진 아이들을 미리 감지하고 면밀히 살펴보다가 빠르게 대처해서 큰 위기를 모면하기도 다.


하지만 집에서는 다르다. 삼 남매는 엄마의 사랑을 나누어 받고 있는지라 늘 엄마의 칭찬과 관심에 목마르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지만 눈에 보이는 아이들의 행동은 울퉁불퉁하고 허점투성이인데 좋은 말만 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2호는 게으른 성향에 아침에 늦게 일어나고 씻는 것 마저 귀찮아다. 이런 성격 탓에 엄마잔소리의 단골손님이다.



갑. 분. 아. 인생상담

(자기 위기 이스에이지)


지금 너의 이런 행동이 미래의 너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잘 생각해 봐.



"빨리 가서 씻고 와." 소리 한번 꽥~지르면 될 것을 이리 돌려 얘기하니 아들도 마른하늘에 번개라도 맞는 느낌 아닐지. 잠도  깬 얼떨떨한 상황에 갑자기 자신의 인생을 고민하라니 얼마나 황당하고 짜증 날까. 나도 하다 하다 안돼서 갑. 분. 인생 상담 버전 잔소리까지 하게 되었지만 듣고 싶지 않은 인생계획을 이렇게 뜬금없이 갖다 붙이니 부담스럽고 어려울 법도 하다. 물론 남편과의 충돌은 더욱 힘들다. 뭔가 불편한 행동과 말이 감지되면 표정이 일그러지고 그냥 입을 닫아버린다. 이렇게 하다 보니 가볍게 편하게 오고 가는 짧은 대화, 티티카카가 있는 일상이 사라지고 있다. 분노와 화가 내 안에서 일었다 꺼졌다 하는 일이 하루에도 몇 번씩 생기다 보니 일상의 소소한 대화가 들어설 자리가 없어지는 게 되는 것 같아 속상하기만 하다.



분노의 행적, 마음 쓰기 수련으로 승화

이 와중에 다행인 것은 이렇게 글을 쓰고 싶은 글감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는 것이다. 불편하고 어려운 것들,  생각과 행동이 다른 에피소드들, 일상생활과 책들이 연결되는 지점들은 더욱 빠르게 캐치되곤 한다.  읽기 에는 무덤덤하게 잠자코 있는 작은 신경세포들이 다 살아난 느낌이라고나 할까. 글귀하나가 작은 감정을 불러오고 그 감정이 다른 감정을 출렁이게 하고 일상의 파도가 수시로 왔다 갔다 하며 넘실대니 웬만한 사람은 꿍짝 맞추기 힘든 상태다. 현재로서 글쓰기 말고는 적당한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

수시로 걸려드는 글감을 있는 데로 낚아 올려 글감 저장고에 담아두었다가 짬짬이 양념을 해서 요리를 해서 글로 담아내고 있다. 화는 나는데 명확한 그 대상을 찾을 수 없거나, 분노의 대상과 내 감정을 나눌 만한 상황이 아닐 때, 혹은 그 대상이 너무 크고 먼 곳에 있을 때는 더욱 글을 쓰고 싶어 진다. 내 감정의 원인과 분노의 출발점을 더듬더듬 찾아가다 보면 불타올랐던 마음이 잦아들거나 정리되기도 하는 신비한 경험을 하기도 한다.


지나친 취향존중이 부른 참사

가끔 가족과 함께 외식을 하거나 영화나 체험을 하려고 뭘 원하는지 물어보면 너무나 다양한 취향과 성향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차 안에서 음악을 듣는 그 작은 일에도 어마어마한 대충돌이 일어난다. 막내는 아이브, 1호는 팝송, 2호는 힙합. 서로가 서로를 위한 중간지대나 협의점은 없다. 결국 가위, 바위, 보로 승부를 보고 돌아가며 각자의 플레이리스트를 선택해 듣는다. 막내의 노래를 틀면 "어, 지겨워."가 큰 애들 입에서 터져 나오고. 1호의 음악이 시작되면, "이게 뭐야." 한다. 돌고 돌아 한 바퀴 음악여행을 마치고 나면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음악과 함께 넘쳐나는 반응과 댓글 발언에 조용한 음악감상은 안드로메다로~


요즘은 각자의 스마트폰으로 그들의 취향에 맞는 글과 음악이 알고리즘을 통해 노출된다. 상황이 이러니 각자의 취향은 더욱 깊어지고 소통과 다른 성향의 미디어의 노출의 기회는 줄어든다. 서로 다른 취향에 대한 배려와 경청이 점점 사라지고 있음을 가족 안에서 적나라하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다른 생각, 다른 음악, 다른 성향이 고루 섞이고 흐르는 모습은 다시 찾기 힘든 것일까. 개인의 취향을 존중하는 것이 결국 모래알 같이 더욱 분리되고 섞이지 않는 색깔의 개인을 만들고 이들이 조화하고 공존하는 배려와 존중은 얕아지는 것 같아 씁쓸하다. 지금 이 시간 우리가 기억할 것은 아직 자신이 모르거나 경험하지 않은 미지의 세계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필요한 때다.


Nothing exists.
: There is something you don't know yet.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의 세계를 소개하는 소우주 박람회라도 한번 해야 할까. 깊어지는 취향과 멀어지는 마음의 거리를 좁히는 소통의 아이디어가 휙~스친다. 실현가능할지는 미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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