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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요일 Feb 02. 2024

금방 깨지고 말 것처럼

라라크루 : 금요문장공부

 쓰는 사람이 되고 나서부터 더 예민한 사람이 되었다. 모든 자극에 금방 빨리 반응하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바깥의 것이 내게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과정을 더욱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고나 할까. 어떤 자극이 내 안에 스며드것을 찬찬히 들어다 볼 수 있게 되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바쁜 일상 속, 쓰기를 염두에 두지 않았던 때는 작은  자극도 사소한 변화도 충분히 바라보못하고 흘려보내기 일쑤였다. 요즘은 잔잔한 마음에 누군가가 던진 작은 돌이라도 던지면 철퍼덕~하며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 천천히 아래로 가라앉고 바닥에 자리를 잡는 그 모든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작은 돌멩이 하나가 나의 어떤 감정을 건드리고 어떤 기억을 상기시키고 어떤 사람을 불러일키고 지나갔다가 기어코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게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고 관찰하고 기어이 쓴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이것이 고통이든 무례든 기쁨이든 즐거움이든 정체가 밝혀지는 것이다. 적절한 반응이라는 심리적 배설물을 내어놓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게 되었다. 돌을 던진 상대는 이미 그 모든 상황을 잊고 지나가 버린 후인데 말이다. 하는 수없이 그제야 글이라는 나만의 해석물을 만들고 빚어낸다. 한 초등학교 선생님이 아이들과 '매일 글똥 누기'라는 프로젝트를 하셨다는데 정말 찰떡같은 이름이다.

 

내게 오는 모든 자극은 아직 정체를 모르는 그 어떤 것일 뿐이다. 외부의 음식물이 입을 통해 들어오고 혀를 통해 맛을 느끼고 식도를 통해 내려가고 위장을 통해 흡수되고 남은 어떤 것이 배설되어야 비로소 밖으로 나오는 것처럼 쓰기를 시작하고 나서는 그 어떤 감정도 반응도 불쑥 튀어나오는 법이 없다.


거친 말이 내게 들렸다.

엇. 저건 뭐지? 잠시 멈춘다.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내 안으로 들어온다. 생경한 것이 깊숙이 파고든다. 살이 찢겼고 장기를 건드리더니 피가 흐르고 비로소 나는 아프다. 아픈 것은 건강한 내 살들을 건드려 상처가 되었을 수도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를 건드려 더 아픈 통증을 느끼기도 한다. 나는 가만히 생각한다. 이 아픔은 무엇을 건드렸기에 내가 이렇게 아픈가. 상대는 어떤 것을 던졌기에 나는 아픈가. 문제는 상대가 뭔가를 던진 그 당시에는 영락없는 바보처럼 멍하니 서 있을 뿐, 한참 후에야 비로소 반응하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아. 프. 다.

마음이 아프다.



드러난 상처에

누군가는 차가운 알코올을 들이붓는다. 아~악! 갑작스러운 통증에 미칠 것만 같다. 하지만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소독해야 한다며 거친 솜으로 상처를 박박 문지른다. 아파도 참으라고 그래야 낫는다고 절규하는 나를 호되게 꾸짖는다.


말이든 글이든 원래의 고통과 실체에 다가가기는 무척이나 멀고 힘든 길인데도 나는 글을 통해 실체를 만나는 긴 여정을 택했다. 나도 내 고통의 실체를 모르는데 드러난 상처만 보고 누가 왜 그런 상처가 생겼는지 알턱이 있을까. 사람들은 보이는 데로 들리는 데로 나를 판단하고 쉽게 판단하고 처방하곤 한다. 지독한 소독약이 지금의 상처에는 최고의 처방인데 당장 소독을 하고 연고를 발라야 상처가 나을 텐데 약하기만 한 나는 계속 상처에 호~ 입김만 불어달라고 나약한 모습을 보인다. 상처를 들여다보며 그것의 고통의 크기를 묘사하고 설명하는 데만 급급하고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상처의 고통에만 매몰된 채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어린 자아는 차가운 소독약으로 치료하고 따가운 연고도 바르는 고통을 참지 못해 아무것도 못하고 상처의 크기만 키우고 있는 건 아닐까.

 

내 안의 어린아이는 언제쯤 용기가 나서 고통스러운 치료의 과정을 견딜 수 있을까. 한바탕 신나게 뛰어놀고 까맣게 잊어버리고, 바쁘게 미친 듯이 살다 보면 상처도 낫고 딱지도 떨어지면 좋으련만... 난 이미 쓰기의 늪에 빠져 아픈 상처를 들여다보고 위로받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는 건 아닌지. 쓰기가 치유가 되려면 상처를 마주하고 고통스러운 치료와 지독한 고독과도 마주해야 하는 것임을, 이렇게 길고 외로운 긴 여정이 쓰기이고 나를 완성하는 과정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 주문처럼 되내인다.


쓰는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먹은 지 5년이 지났다. 무소음 탁상시계의 초침처럼 느릿하게 기어가던 글쓰기가 익숙한 일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시간의 흐름을 눌러 꾸역꾸역 써 왔기 때문이리라. 시간은 한없이 느리지만 한편으론 빠르다. 글쓰기에 왕도는 없다. 내가 아는 유일한 방법은 쓰기를 멈추지 않는 것, 느릿느릿 천천히 가는 여정일 뿐이다.

출처. [마흔에 글을 쓴다는 것] 권수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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