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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요일 Feb 25. 2024

김대호는 왜 인왕산에 올라갔나?

라라크루: 금요문장공부

하루에 한 번, 시간을 내서 동네 자치센터에서 운영하는 헬스장엘 간다. 러닝머신에 올라 뛰는 30분, 혼자 운동하는 외로움을 TV를 보며 달랜다. 채널 돌리다 가볍게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골라보는데 그중 하나가 혼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나 혼자 산다>이다. 개성 넘치고 자유로운 싱글라이프를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제도 아무 생각 없이 TV를 보며 뛰었다. 그런데 반듯하게 생긴 아나운서 김대호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그는 최근 빡빡해진 일정 탓에 몸이 피곤하고 지쳤다며 백숙을 먹는다고 시장엘 간다. 쉽고 편하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요리하는 게 아니다. 힘들고 어려운 방법으로 뛰고 달리고 기다리고  산까지 오르며 재료를 구한다. ( '나는 자연인이다' 아님 주의 )


  

다, 내 만족이죠.

어깨에 큰 가방을 메고 재래시장을 누비는 그. 상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가격도 흥정하며 각종 채소와 과일을 산다. 심지어 90명이 넘는 대기인원을 기다려서 토종닭을 사기도 한다. 집에 와서 사온 재료를 내려 놓고 바로 요리를 시작하는 가 싶더니, 또다시 가방을 메고 어디론가 향한다. 집뒤에 있는 인왕산을 씩씩하게 오른. 가파른 산등성이를 고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다니어느덧 정상에 도착해 심호흡 한 번 하고 다시 내려온다. 그리산 중턱에 멈춰 백숙에 넣고 끓일 약수를 통에 받는다. 다른 출연진들은 의아해하며 묻는다. 굳이 왜 그렇게 힘들게 재료를 구하냐고. 그는 "만족이죠"라며 멋쩍게 답한다.


아닌 게 아니라 식재료를 가방에 넣어 무겁게 메고 장 보러 갔다가 또 약수를 구하러 등산하는 과정이 힘들 법도 한데 그는 한숨 한번 쉬지않고 시종일관 싱글벙글 웃기만 한다. 어려운 과정을 감내하면서 최고의 밥 한 끼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그의 모습이 마치 도인 같은 느낌이 들 정도. 어떤 때는 오히려 그 힘든 과정이 자신의 몸을 만들고 단련하는 좋은 기회로 만들어 즐기고 있었다. 약수가 큰 물통에 담기는 그 시간을 그는 또 지게 쓴다. 약수터 바닥 아무데나 털썩 주저앉아 햇볕을 즐기는 그. 그런 그의 모습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참으로 소중한 자연의 선물을 행복하게 누릴 줄 아는  같았다. 세상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만 놓치고 사는 자연의 신성함, 햇살이 머무는 그의 얼굴에 늘 바쁜 현대인들에게는 볼 수 없는 원초적 충만함이 아련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주변에 공짜로 주어지는 것들을 기꺼이 찾아 즐기고 남에게 인정받기 위함이 아니라 스스로의 만족하며 사는 그의 모습에 도끼를 맞은 듯 머리가 띵하다.


약수터에서 기다리며 쉬는 김대호


화룡점정은 

요리를 하고 맛있게 먹기 위한 준비를 하는 과정이었다. 야외에서 버너에 큰 양푼냄비에 닭과 사온 재료, 약수를 넣고 끓이기 시작한다. 여기까진 평범했다. 그러더니 작은 마당 창고를 뒤져서 잘 보관해 두었던 비밀 장비를 꺼낸다. 무엇일까 호기심에 가만히 살펴본다. 가정용 수영장 세트였다. 그는 각각의 분리된 뼈대를 능수능란하게 조립하고 방수천을 펴서 연결하더니 어느새 근사한 수영장을 완성한다. 이 정도면 '와, 신박하다'하고 신기해할 정도인데, 갈수록 점입가경이다. 그는 물을 기르고 나르고 하더니 성에 안 찼는지 새로운 방식으로 세탁기 수도에 호스를 연결해서 힘겹게 물을 채우기 시작한다. 수압이 어느 정도 세지고 물이 잘 채워지자, 갑자기 주방에 들어가 시장에서 사 온 신선한 과일을 씹어 내오고 막걸리, 소주 등을 물에 담근다. 스노클링 장비와 튜브까지 꺼내와서 한 참을 준비하고 세팅하더니 드디어 입수. 튜브에  누워 편안하게 즐기는 그의 모습이 기가 막힌다. '아, 이렇게 즐길 수 있구나!' 


집안의 작은 수영장을 만들어 즐기는 김대호


김대호가 내게 남긴 것은
잠깐이지만 그의 모습에는 남다름이 있었다.

편리함으로 잊고 지냈던 수고스러운 과정 끝에 오는 찰나의 깊은 만족감

일회용이나 배달이 아니라 재래시장, 근처 인왕산, 마트가 아닌 동네 슈퍼서 재료를 구해 요리하는 로컬중심의 슬로푸드를 추구하는 친환경적인 삶.

남들은 의식하지 않고 나의 욕구에만 충실한 소박하지만 확실한 소신.

혼자서도 자족하며 사는 홀가분한 자유로움.

수고로운 과정을 즐기는 긍정인적인 삶의 태도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를 보는 내내 잊고 지냈던 원초적인 즐거움과 혼자서도 자족하는 자유로움을 다시 상기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신선하고 재밌었다. 밥 한끼를 위해 애쓰는 모습이 뭐가 그리 재밌을까 싶지만 실제로 그랬다. 무엇보다 남의눈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당당함과 자유로움. 생각해 보면 우리가 가진 두려움과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은 내 안이 아닌 내 밖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해서 오는 경우가 많다. 남들이 나를 이상하게 볼까 봐,  편하게 지낼 수 있는데 굳이 어려운 길을 택하면 바보 같아 보일까 봐, 남들이 먹는 걸 나만 다르게 선택하면 까탈스럽다고 할까 봐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거나 자제하곤 한다. 통제된 욕구는 어느샌가 불만족의 포인트로 쌓이고 과도하게 피로하고 소진되다가 때때로 불행한 삶에 이르게도 한다. 타인과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차갑지 않게, 그들을 존중하면서도 나의 욕구도 잘 챙겨사는 노하우는 현대인의 커다란 숙제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소박하지만 단단한 행보는 잘 편집된 프로그램이라고 할지라도 시사하는 바가 컸다. 적어도 나에게는.

당신이 선택한 이미지를 인정받으려는 노력은 승산 없는 싸움이다. 진짜 당신은 에고가 대외적으로 과시하려는 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진짜 당신인 것처럼 믿게 하려는 바람에서 더 나은 이미지를 끊임없이 모색할 수밖에 없으니 당신의 삶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출처. <행복을 풀다> – 모가댓 지음/강주헌 옮김


내 소중한 땀방울

고작 30분간, 러닝머신에 올라 운동을 하면서도 스스로 그 과정을 즐기지 못하고 TV프로그램을 찾는 병약한 현대인인 나, 스스로 자족하는 김대호의 수고스러운 행복추구행보를 엿보며 나를 돌아본다. 나는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얼마나 가지고 있을까. 약수를 뜨러 인왕산을 오르고 토종닭을 사기 위해 대기번호 93번을 기꺼이 쥐어든 그의 수고에는 숨겨진 찰나의 행복, 기다리고 즐기는 과정의 기쁨이 스며들어 있었음을 어렴풋이 느낀다. 내 짧고 귀여운 고행 끝, 송골송골 맺힌 귀한 땀방울을 기분 좋게 닦아내며

'이 또한 나쁘지 않다' 혼잣말을 한다. 찰나의 행복이 내게도 잠시 있었음을 감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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