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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요일 Mar 28. 2024

고객님, 배터리 충전할 시간입니다.

대담한 착각, 단순한 진리

아이를 잘 키운다는 것.

아이 셋을 낳고, 교사 경력 20년, 여동생 셋과 지지고 볶고 자랐던 내력이 있는 나 같은 사람은 이쯤 되면 육아는 누워서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현실은 참담하다. 어리면 어린 데로 크면 큰 데로 아이들은 끊임없는 숙제를 내게 안겨준다. 이제 제법 커서 막내가 초4, 중3 둘째, 고1 첫째가 되었지만 아직도 어렵고 힘든 것이 육아다. 요즘 드는 생각은 아이들과 지낸다는 것은 결국 나라는 존재와 잘 지내는 아닐까. 아이들은 전적으로 부모에게 의지했아동기를 지나 비판정신이 폭발하는 청소년기에 이르렀다. 뾰족하고 예리한 비판의 대상다름 아닌 부모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의 부족함, 선입견, 작은 실수와 의식하지 못한 잘못된 습관까지도 아이들은 귀신같이 잡아낸다. 그 보다 더한 충격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나의 행동을 아이들이 하고 있을 때, 그땐 정말 머리카락이 쭈뼛선다. 심각한 각성의 순간을 맞닥뜨리곤 .


아, 이젠 내가 바뀌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퉁명스러운 말투, 짜증 내는 표정까지

퇴근 후, 온 에너지를 다 쓰고 집에 오면 축 쳐져서 아무것도 하기 싫다. 대충 씻고 누워서 충전기에 코드를 꽂듯 30분쯤 침대에 누워 방전된 몸에 에너지를 공급한다. 그런 나의 상태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들은 오며 가며 습관처럼 나에게 요구한다.


큰딸: 엄마, 나 수련회 가야 하는 데 옷 좀 사줘.

나: 아니, 무슨 옷이야. 사준 지 얼마나 됐다고 그냥 입던 거 입어.



아이는 툭 던지듯 말을 하고 엄마도 짜증 섞인 말로 대답한다. 다시 만난 반가움과 기쁨은 없다. 그 흔한 인사도 없이 필요에 의한 말만 다짜고짜 주고받는 풍경, 이젠 지나가던 막내가 한 마디 한다.


막내: 엄마, 나 포카 케이스 사줘!

언니: 아니. 무슨 케이스야. 그딴 걸 왜 사.


판박이처럼 나와 똑같은 말투로 동생을 대하는 큰 딸의 모습말문이 막힌다. 친절과 인내는 일터에서 다 사용하고 집에선 남은 에너지를 탈탈 털어 먹고사는 일만 간신히 하고 있음이 들켜버린 순간. 나의 빈틈이 여실히 드러나버렸다. 아이들은 아직도 나를 거울처럼 보고 배우고 따라 하고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든다.

 

스스로를 돌보는 방법을 모르는 나.

내가 먼저 행복하고 내가 당당하고 내가 나를 사랑해 줄 수 있어야 했다. 그래야 내 아이에게 더 많이 웃어줄 수 있었다. 웃는 나는 아이에게 안정감과 평화를 주고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아이는 새로운 것을 탐색하고 도전할 수 있는 힘도 얻을 수 있다. 또 충분히 사랑받았던 기억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더 많이 베풀고 긍정적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행복해지겠지.


근데 솔직히 고백하자면 아직도 나는 나를 잘 돌보는 법을 모른다. 타인의 요구와 필요에 반응하는 것이 먼저였던 긴 시간을 지나고 나니 그것이 익숙해져 버렸다고 하나. 내 욕구를 등한시하고 미뤄두었던 습관은 괜한 불만과 퉁명스러움으로 가까운 사람들을 소홀히 대하고 있었다. 편하고 힘들다는 이유로.



언제나 든든한 안전기지가 되어줄 것

내가 지쳐도 힘들어도 아이들이 나에게 언제든 돌아와 쉬고 지지받을 수 있으려면 나 또한 내 욕구를 잘 다스리고 안정적인 심리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며칠 전 화를 내고 툴툴대는 2호 아들과 심한 충돌이 있었다.


내가 이렇게 덩치가 커도 그냥 아이일 뿐이잖아.
나도 칭찬받고 싶고 그런데 나한테는 왜 그렇게 안 해주냐고.


울며 소리치는 아이의 고백에 난 그만 말문이 막혔다. 울퉁불퉁한 표현과 행동에 집중한 나머지 아이의 잘못과 실수에 지적하느라 애정과 지지가 부족했던 내가 보였다. 그것을 고백하는 아이가 안쓰럽고 또 귀여워져서 그 큰 불금 같은 아이를 와락 안아주고 말았다. 온전한 내가 아니라고 해서 부모라는 역할에서 도망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저 지금의 나를 고백하고 한번 더 안아주는 일을 할 뿐.


엄마가 미안해.
우리 아들이 다 큰 줄만 알고.
엄마도 소리쳐서 미안해.
사랑해.



너머의 것을 읽어라.

불완전한 존재인 부모는 내 자식만이라도 완전체를 만들고자 애쓴다. 그것이 부모의 역사적 사명인 것처럼 필사적으로. 그러나 아이들은 부모가 자신의 잘못을 지적할수록 '아. 내가 이걸 고쳐야겠구나. 부모님이 나를 위해 이렇게 혼내서 가르쳐주시다니 감사하다.'라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안돼. 나는 늘 비난받고 지적받는 부족한 인간이야. 날 지지해 주는 사람은 없어.'라는 메시지로 해석되고 있었다. 아이는 애착으로 형성된 든든한 안전기지가 없어 불안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다양한 방법으로 나에게 있는 그대로 나를 받아주고 인정해 달라고 시위하고 있었는데 나는 말투나 행동이 왜 그러냐고 지적하고 있었으니 악순환의 고리가 무한반복될 뿐. 행동의 이면의 메시지를 읽고 안아줄 내 안의 여유가 없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방법은 하나.

아이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잘못은 따끔하게 일깨워주되 아이의 존재에 대한 수치심은 느끼지 않게 하는 고난도 애정표현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너는 참 괜찮은 아이야.
있는 그대로 사랑스럽고.



오늘도 퉁퉁거리며 들어오는 아이의 뒤통수에 '사랑한다. 수고했다.' 말한다. 살가운 반응을 기대하지는 않느다. 부모의 애정포인트를 한결같이 충전해 준다는 느낌으로 계속할 뿐. 밑 빠진 독도 언젠가는 채워질 거란 미련스러운 믿음으로.


 잠깐의 휴식으로 내 몸과 마음의 배터리가 20~30% 충전된 것 같은 느낌이 들 때쯤, 방전된 아이의 애착 배터리도 냉큼 충전해 준다. 학교얘기도 묻고 친구얘기도 묻고 잊지 않고 엄마를 놀리며 웃는 아들을 본다. 내 곁에 슬그머니 누운 아이의 눈에서 편안함의 배터리도 한 칸씩 깜박이며 차오르고 있었다.  해도 해도 늘지 않는 부모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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