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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천개의 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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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요일 May 06. 2024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대한민국에서 교사로 살아남기

2024.04.19. 악성민원인 대응

그리고 2주 후, 나는 병실에 누워있다.


일주일 정도 치료받으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그러나 세게 얻어맞은 (정신적) 충격은 온몸 구석구석에 깊은 흔적을 남기고 컨디션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침형 인간이었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눈을 뜨면 다시 자리에 눕고만 싶었. 지독한 무기력증에 사로 잡히고  것이.



단 한 번의 충격이라 할지라도

반복된 가해가 아닐지라도 그 피해는 오래갔고 내 몸에 잠재되어 있던 허약함을 일제히 소환해 냈다. 이명과 불면증, 어깨와 목의 근육경직과 두통, 디스크 재발과 무기력, 배변장애와 수면장애. 일주일간 나를 괴롭힌 불편감은 이비인후과, 정형외과, 정신과, 한의원을 전전해도 그대로였다.


 병가를 내야 할 것 같습니다.



꼬박 일주일을 앓아내고서야 이 말을 내뱉을 수 있었다. 그리고 또 일주일은 나를 대신할 사람을 기다려야 했고. 수면제와 근육이완제, 귀의 이명을 줄여주는 약 등등 아침, 저녁으로 4개의 약봉지를 뜯어 입으로 털어놓고 가까스로 출근하며 일주일을 또 버틴다. 아이들은 해맑고 학교는 여전히 분주하다. 나 또한 내 몫의 일을 묵묵히  뿐 다른 수는 없었다. 때때로 찾아오는 통증은 수업과 수업사이, 공강시간에 어두운 여교사 휴게실 초라한 바닥에 몸을 눕혀가며 살살 달랜다. 길게만 느껴지는 한 주를 보내고 있던 어느 날.



강사선생님 구했어요.




"이제 편히 병가 내고 쉴 수 있게 되었네요."라는 말을 듣고 그제야 한숨 돌린다. 그리곤 인수인계할 업무를 꼼꼼히 체크한다. 포스트잇에 하나씩 쓰고 정리하면서 새삼 깨달았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이렇게 많았구.' 수업관련된 일 하나만 정리하는데도 포스트잇 수십 장을 빼곡히 채웠다. 수업 활동지, 수행평가 진행과 채점, 동아리 준비, 주제선택 수업 방법과 활동지 등등까지 챙기고 나니 허리통증이 다시 시작된다.


잠시 누웠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본다. 5분쯤 지났을까. 챙겨야 할 부서 업무가 갑자기 떠오른다. 벽을 잡고 일어나 부원을 찾아간다. 까먹기 전에 필요한 일을 자세히  말해둔. 말하고 돌아서는데 미안함안도감이 교차한다, 그리고 퇴근. 그동안 미뤄두었던 피로감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불면을 치료하는 약 한 봉지를 털어 넣고 바로 잔다.



토요일 아침

정신과약은 사람을 맥없이 몽롱하게 만든다. 알딸딸한 기분과 가라앉은 몸을 추슬러 2년 전, 극한의 허리디스크 통증을 치료해 주셨던 <수상한 병원> 원장님을 다시 찾았다. 효과는 빠르고 정확하지만 너무 아프고 괴로운 치료과정을 알고 있기에 용기가 안 나서 미루고만 있었다.


https://m.blog.naver.com/blume9506/222916551566


  인체를 단절하고 쪼개서 따로따로 증상별로 찾아다니는 병원투어는 나를 지치게 한다. 그래서 웬만하면 마음이 편한 한의원엘 더 자주 갔었다. 그런데 이번엔 어쩔 수 없이 여기저기 병원을 떠돌아 다녔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한 의료기록 때문에. 그런데 각기 다른 의견과 치료뿐 아니라 진료 병원마다 챙겨주는 약도 다 따로라 그 많은 약을 한꺼번에 먹는 것도 부담이 되었다. 


양방의원임에도  전체를 보고 흐름과 관련성을 파악해 진료해 주시는 곳은 내가 아는 한 병원 한 곳 뿐이니 병가를 내고 제대로 치료해야겠다 마음먹고 다시 찾아왔다. 거의 1년을 드나들었던 병원이라 다시 와도 어색함은 없다. 오히려 오랜만에 병원식구들을 뵈니 반가운 마음이 들 정도. 잠시 대기하다 원장님을 뵙는다.

 

아.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그간 있었던 일을 든든한 아군에게 하듯 날 좀 구해달라고 간절한 마음까지 담아 하나하나 빠짐없이 말한다. 한참을 들으시던 원장님은 당장 입원하고, 머리 쪽 MRI를 찍어보라고 하신다. 마음이 덜컹! '무슨 일일까' 긴 검사와 치료를 마치고 MRI결과를 들으라며 원장님이 다시 나를 부르신다.


이게 원인이었어요.
목 디스크가 터졌네요.



아. 진짜. 이게 또 무슨 일인가. 겨우 치료하고 달래온 허리디스크가 잠잠해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목 디스크까지 생겼다 말인가. 그 모든 것이 그 악성민원인 탓인 것만 같다. 가족과 친한 지인에게 사실을 알리고 병실에 누워있는데 억울함이 또다시 차오른다. 물리적 상태의 정확한 인과관계는 의사 선생님들의 소견이 필요하겠지만 정확히 4월 19일 악성민원인 응대 이후로 몸이 안 좋아진 건 확실했다.



신고만이 답인가

민원인 응대 이후로 내 삶은 멈추었고, 우리 집은 엄마와 아내를 잃었다. 이제 얼마간 내가 가르치던 아이들도 그간 같이 정답게 수업했던 선생님과 함께 할 수 없게 되었다. 나 또한, 또 다른 질병하나를 새로 얻어 기나긴 치료과정을 감내해야만 하려니 뭔가가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민원인 한 명의 무분별한 행동이 만들어낸 나비효과가 자꾸만 커져가고 있음에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다시 한번 나를 덮친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 경찰이 된 제자의 이름이 하나 떠오른다. 염치불구하고 연락을 한다.


00아. 샘이 악성민원인 한 명을 신고해야 할 것 같은데. 도와줄 수 있겠니?



상황을 전하고 도움을 요청하자, 잠시 후 장문의 카톡이 도착한다.

선생님! 현재 상황이 어떤 법적 조치가 있는지 찾아봤었는데요!!

형법 283조 협박죄
정보통신망법 44조(욕을 지속적으로 할 경우만)
스토킹처벌법 (욕을 하지 않아도 연락을 2번 이상 지속적으로 할 경우)

제가 담당 형사면은 이 죄명을 적용할 거 같은데, 제가 방금 공무원 악성민원 판례를 봤는데 악성 전화를 100통 이상 한 사례만 처벌받고 나머지는 다 안된 거 같아요... 제가 생각해 보니깐 작년에 **파출소에 있을 때도 비슷한 경우로 협박성 전화를 받았다고 신고 들어왔었는데  사건처리는 안된 걸로 기억해요 ㅠㅠ 그래도 그 한번 해보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담당 형사분이 사건을 하게 되면 필요한 서류를 말씀해 주시겠지만 제가 생각했을 때는
1. 민원인 없어진 전화번호
2. 민원 녹음 내용
3. 진단서 및 선생님께서 쓰신 브런치스토리
준비하시는 게 좋을 거 같고! 악성민원 사례들을 보니깐 형사처벌이 아닌 민사적인 부분인 공무상 재해로 산재청구로 하는 거 같더라고요 ㅠㅠ 그래도 최근에 민원인 때문에 공무원이 잘못된 뉴스가 많아서 경찰조직이 최신의 이슈가 된 문제로 많이 민감해서 잘 받아줄 거 같아요!!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내용을 어떻게 찾아냈는지는 몰라도 신통방통한 제자는 관련 법조항과 대응방법, 민원처리 방법까지 잘 정리해서 보내주었다. 든든하고 고마웠


다녔던 여러 병원에 연락해서 진료확인서, 진단서까지 준비한다. 그런데 마지막, 그 민원인의 전화번호. 하나뿐인 단서가 기억나지 않는다. 교감선생님께 SOS를 외쳤지만 당연히 외우고 계실리가 없다.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른다.


악성민원을 100번 받아야 처벌할 수 있다고?

제자가 보내준 글을 찬찬히 다시 읽어본다. 단 한 번의 악성 민원에도 대책 없이 이렇게 흔들리고 아픈데, 그런 민원을 100번 넘게 받아야 처벌받는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100번을 견뎌내야 비로소 법의 심판을 받을 수 있다니, 너무 가혹한 것 아닌가. 단 한 번의 민원이라도 그것을 대응했던 상대의 상태에 따라 치명적일 수도 있지 않은가. 게다가 그 민원인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욕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온갖 모욕과 인신공격, 협박을 가해 고성으로 말하고 정확히 5분 전 똑같은 내용으로 다른 남성도 전화해 민원을 제기했었다. 마치 짜고 한 것처럼 똑같은 내용으로. 다시 또 열이 오른다. 하, 빙글빙글 계속되는 생각의 꼬리가 밑도 끝도 없이 길어지기만 한다.



계산이 필요한 시간

이 사건을 신고하고 민원인을 찾고 사과와 보상을 받는데 들어갈 시간과 노력과 이걸 그대로 고 참았을 때 내가 감내해야 할 억울함과 무력감, 계속된 치료로 받을 스트레스, 시간과 비용을 계산해야 했다. 스마트한 보험설계사에게 문의를 하고 의사 선생님들께 소견서를 부탁하고 여기까지 하는데도 힘에 부친다. 이 모든 것을 신묘한 기계에 쌓아두고 정확한 수치로 알아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헛헛한 마음에 밑져야 본전정신으로 지성인답게 Chat GPT에 답을 물어본다.

챗GPT의 답변


제법이다.

상황을 정확히 평가하고 자신의 안전과 행복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라니. 우문현답 아닌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신고하자니 피해자인 내가 병의 치료에만 집중하지 못하고 그 모든 과정을 스스로 밟아나가야 한다는 부담이 너무 크다. 그렇다고 가만있자니 이 모든 피해에 대한 억울함에 스트레스가 자꾸만 커질 것만 같다. 모든 걸 용서하라는 부처와 예수의 말은 이미 안드로메다로 간지 오래지만, 같이 싸울 힘도 남아있지 않으니 이대로 포기하는 것 또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어디 흑기사 없나요?  술 마실 때만 말고 이럴 때 짠! 한번 나타나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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