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취인 불명

너에게 보내는, 닿지 못할 편지.

by 블루나잇

작지만 다부진 체격, 유한 달빛을 닮은 옅은 눈매,

순백의 셔츠가 잘 어울렸던 그를 나는 아직까지도 잊을 수가 없다.


어른은 아이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올바른 어른들이 있는가 하면, 아이보다 더 아이 같은 어른이 존재하기도 한다. 아이는 아이다워야 한다고 말하면서, 어떤 때에는 아이가 어른스럽길 바란다. 그 아이스럽거나 어른스러운 천사들의 사유지에서 우리는 살아가는 법을 배운 적이 있다. 나 또한 아이는 어른의 돋보기가 아닐까 자주 생각했다. 주로, 진로 교사라는 명목으로 이따금씩 중학교에 출강해, 아이들과 꿈에 대한 사유를 주고받을 때 그러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


내가 참여하는 강의는 매번 다른 학교를 방문하는 방식이었다. 한 번 보고 서로를 지워야 하는 일회성 만남에서, 우리는 내일을 그리고 다음을 꿈꾸곤 했다.

강의 초반, 외부 강사 대기실에 앉아 컨디션을 회복하다가도, 오늘은 어떤 아이들을 만나게 될까 몰래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그건, 고작 새벽 출근길 따위의 피로가 방해할 수 있는 설렘이 아니었다. 가끔은 늘 해 오던 일인데 덜컥 겁이 나는 때가 있다. 잡생각들이 무차별적으로 나를 잡아 삼킬 때 그랬다. 함께할 아이들은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고, 사랑스러운 미소로 나를 반길 텐데, 모든 것을 알면서도 쉽사리 긴장을 풀지 못하는 날들이었다.


먹구름 같은 걱정은 수업이 시작되면 곧바로 사라졌다. 영롱한 요정들의 해맑은 눈동자가 내 영혼을 끌고 먼 우주까지 달아나기 때문이다. 나는 어찌하지 못하며, 그들이 이끄는 대로 넋 놓고 따라간다. 잔뜩 올라간 입꼬리는 애저녁에, 천사들에게 빼앗겨 버린 듯했다. 그날도 유쾌한 공기에 몸을 맡긴 채, 평화로운 수업이 이어졌다. 찬바람을 묻힌 교복에, 손때가 쪼록한 볼펜을 쥐고, 가열차게 집중하는 소중한 얼굴들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볼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황홀한 업인가!


그날의 아이들은, 꽤 활발한 편이었다. 하나가 질문을 하면, 쉴 틈도 주지 않고 다른 하나가 질문을 이어왔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손을 드는 모습들이 문득 애정의 척도 같아서, 그저 반가웠다. 몇 시간을 책임지는 선생님으로서의 존재를 일깨워주는 것만 같았다. 그중 사이가 매우 허물없어 보이는, 두 명의 남자아이가 눈에 띄었다. 각자의 꿈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시간이 다가오자, 이런 말을 퍼트리며 교실을 빙빙 돌고 있을 때였다.


“혹시나, 교장 선생님이 보시면 안 될 것 같은 그림을 그리는 친구가 있다면 선생님한테 꼭 말해줘야 해.”

아까의 남자아이 둘 중, 하나가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선생님! 얘요! 얘 좀 보세요!


그림을 그리기 위한 도구는 학급마다 개수가 정해져 있었기에, 나는 다소 불안한 마음을 안고 다가갔다. 아이가 지적한 친구의 그림엔, 주식 그래프가 그려져 있었다. 그림이 조금 버석하게 느껴지는 일 외에는 딱히 불순한 지점이 없어 보였다. 나는 궁금한 마음으로 물음표를 날렸다. 어느 부분이 마음에 걸렸던 거야? 그러자 아이의 몸체가, 금세 주식 전문가로 둔갑하며 예리한 답을 뱉어냈다. 빨간 줄이 계속 올라가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나는 무방비한 상태로 얻어맞은 듯,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답을 들었기 때문이었고, 긴장한 뒷목을 너울너울하게 만들 만큼, 참신하고 귀여웠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마도 불경기 같은 주식 시장에서, 현실적이지 않은 그래프를 그린 것을 지적하는 듯했다. 만 16세도 웃돌지 못한 아이들이 이렇게나 영민하다니,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나는 미소 지으며 답했다. 원래 꿈속에선 행복한 일만 일어나는 거잖아.

슬쩍 시선을 옮겨, 친구의 공상을 고발했던 아이의 그림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자유롭고 큰 규칙이 없어 보였지만, 특유의 깜찍함이 존재감을 뿜어대었다. 그 안에는 눈을 사로잡는 검은색 뿅망치가 그려져 있었다. 맨 윗부분에 적어놓은 직업을 알고 나니 비로소 이해가 됐다. 판사봉이었구나. 위트가 난무할 정도의 심혈을 쏟았을 그에게 동경을 표하고 싶어 조심스레 말을 붙였다. 끝내주게 잘 그렸는데? 곧이어, 창의력이 자라나는 비밀의 샘물을 가진 듯한 대답이 나를 또 한 번 뒤로 넘어가게 만들었다. 제 돈가스 망치 멋지죠?


판사봉을 두고, 돈가스 망치라니. 세계에서 가장 귀여운 어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상상하는 판사라는 직업은 아마도 우주에서 제일 멋진 돈가스 망치를 들고 법을 심판하는 일이리라. 문득 그가 판사로 참여하는 공판에서 나의 존경 어린 눈빛을 보내는 장면을 떠올렸다. 거꾸로 봐도 감격스러울 미래였다. 다시 현실로 돌아오자 수많은 내일의 인재들이 눈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살짝 긴장되는 마음에, 목구멍이 건조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림을 끝까지 완성하는 것은, 정해진 시간 동안 커다란 몰입을 기울여야 하는 부분이었다. 아이들이 자기 고유의 주체적인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자신의 작은 별에 숨어있던 꿈을 밖으로 토해내며, 눈으로 직접 실감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 거룩한 순간에 서서, 나를 유독 자주 찾는 아이가 있었다. 말투가 다소 느림직했으나, 누구보다도 열정적인 눈빛으로 내 수업을 청명하게 정화시켜 주는 아이였다.


다른 아이들이 나를 한번 부를 때, 그 아이는 나를 세 번 불렀다. 열심히 참여하는 자세가 예뻤지만, 몸이 하나였던 나는 그에게 자주 기다림을 고했다. 잠깐만, 응 잠깐만, 선생님 다시 올게. 내 등을 바라보는 아이를 두고, 나는 멀리 다른 아이들을 돌아보러 다녔다. 물론 다른 아이들도 다 나의 사랑스러운 학생들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고 여린 시선이 나를 향해있는지도 모를 만큼 내 정신이 반쯤 빠져있었을 터였다.


다채롭게 뒤섞인 색조합으로 특유의 빛을 방사하던 그의 그림은, 수업을 마무리 지을 즈음엔 더없이 위엄을 뽐내는 작품이 되어 있었다. 어린 땀방울이 곱게 서려있는 영광의 갈채들을 영접하노라면, 흡사 유명 갤러리에 초대받아, 경의에 가득 찬 눈빛으로 분위기를 즐기는 방문객이 된 기분이었다.

산을 오르듯 섬세한 꾸미기 작업을 넘어, 우당탕탕 재기 발랄한 발표까지 나름 여유롭게 마치고 나니, 마침내 모든 임무가 끝났다. 숨을 잠깐 돌리려 하자, 쉬는 시간을 알리는 음악이 울려왔다. 독특한 해방감을 느낀 나는 서둘러 교실을 빠져나갈 채비를 했다. 그때였다.


“선생님 제가 들어드리면 안 될까요?”


나를 자주 부르던 그 아이가 건넨 말이었다. 아이들의 그림이 담긴 박스를 나 혼자 들고 갈 것이 내심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박스들은 교무실이라는 목적지를 품고 있었다. 다붓하게 두드리는 말투에 몸이 살짝 가려운 느낌이 들었다. ‘들어드릴게요’도 아니고, ‘들어드리면 안 될까요’라니. 그의 예의 바른 순수함에 내 마음이 일순간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애정의 감정이 우리의 주변을 휘감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긍정적인 답변을 줄 수 없었다. 그를 위해서였다.


“아니야, 이거 엄청 무거워. 선생님이 들게. 마음이라도 고마워.”


내 말이 닿자, 그의 곰살궂은 눈이 삽시간에 슬픔을 쏟아냈다. 간절한 부탁의 레이저를 마구 쏘아대는 것 같았다. 바보 같은 나는 그를 더 위하고 싶어졌다. 진정으로 위하는 게 뭔지도 모르면서, 그의 행복을 다 아는 사람처럼. 어쩌면, 나는 그에게 다른 의미로 무례했는지도 몰랐다. 실의에 빠진 그를 두고도, 크게 괘념치 않았던 나는, 끝까지 내 결정이 옳은 선택이라 여겼다. 교무실에서 마무리할 시간이 줄어들고 있음에 초조했다.


다리가 굳은 채로, 헤어짐을 놓지 못하는 그를 달래주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 다음에 또 만나자, 알겠지? 내 말이 그에게 녹아들자, 천근 같은 고민을 안은 듯한 표정으로 그가 답했다.


“우리가 또 만날 수 있을까요?”


짧은 한 마디가, 선 채로의 세상을 모두 휩쓸어갔다. 그러나 이런 감정은 그를 떠나고서 느끼게 된 나만의 회한이었다. 내가 건넸던 말과 그에게서 받아온 말이, 무슨 의미로 어떻게 남겨질지.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나는 그에게 어떠한 희망 고문 같은 약속을 던지고 떠나온 것일까. 아무것도 몰랐던 과거의 나는, 방울이 그렁그렁한 물음에 이렇게 답하곤 황급히 계단을 내려갔다.


“당연하지, 우리 또 만날 거야.”


차분한 사랑을 전해 준 그에게, 나는 거짓말을 건넸다.

내가 흘러간 뒤로, 그가 얼마의 시간을 영원처럼 서있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없이 많은 날들이 지나도, 떠내려가지 않고 오히려 선명해지는 기억들이 있다. 나에겐 그날의 기억이 그렇다. 여느 아이들처럼 점심을 먹으러 달려가지 않고, 복도의 중앙 계단까지 졸졸 따라 나와 ‘선생님 제발요. 제가 들어드릴게요.’ 말하던 그의 예쁜 마음을 잊지 못해서. 이따금씩 아름다운 경험들을 곱씹어 담을 때, 그 아이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 같은 환각 증세를 겪었다. 동시에 크게 들었던 후회라는 감정이, 내 온몸을 시도 때도 없이 쿡쿡 찔러대는 것 같았다.


그냥 들어달라고 할걸. 사실 그렇게 무거운 짐도 아니었다. 차라리 같이 들자며, 재치 있는 추억을 하나 더 만들어 서로의 책가방에 담아도 괜찮았을 것이다. 아니, 내가 들면 되니 교무실로 향하는 길까지 신나게 말동무만 해 달라고 부탁해도 될 일이었다. 지나가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이 너무 많다. 그땐 보이지 않던 것들이라서, 돌이킬 수 없기에 더 슬펐다.


나는 이 이야기를 동료에게 전할 때마다 후회하고, 홀로 글을 적다가도 후회하고, 때로는 밥상머리에서, 욕실에서, 소파 위에 뒹굴면서도 후회한다. 여린 마음에 상처 주지 않았길 바라면서. 어쩌면 이제는 기억조차 못할 나라는 사람을, 그의 마음에 더 크게 더 믿음직스럽게 새겨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염치없는 욕심까지 잔뜩 삼키며 후회를 털곤 한다. 이제는 그가 나를 떠나간 것인지, 내가 그를 떠나온 것인지조차 헷갈리는 기분이다.


조금의 생채기나 여운이라도 남겼을 법한 시간이었다면, 기꺼이 그의 인생에서 사라져도 괜찮다. 괜찮지 않다. 괜찮다. 사실 모르겠다. 그가 살아가면서 겪을지도 모를 두려운 찬물결에, 한 떨기 쉼이 될 만큼의 친절을 조금만 더 베풀고 돌아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나를 그 언젠가 스치듯 지나쳤던 사람쯤으로 기억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지난 아쉬움을 담아, 나는 마음속에 구겨놓았던 볼품없는 편지를 이곳에 털어놓아 본다.


-여전히 부드러운 시선으로 살아가고 있을 시후에게.

시후야 안녕. 잘 지내? 옛날에 같이 꿈그림 그렸던 선생님이야. 그날 워낙 정신이 없어서 시후의 꿈도, 시후가 다녔던 학교도, 생각이 잘 나질 않아. 모두 변명 아니냐고? 맞아 사실 변명이야. 그렇지만 기억나지 않는데 기억나는 척하고 싶지 않았어. 투명할 정도로 순수한 너에게, 거짓말을 할 생각은 없었거든.


그래도, 네가 그렸던 조그마한 사람들의 세심한 숨결, 연둣빛 색감의 흔적, 마스크 너머로 보이는 깜찍한 눈망울까지. 내 마음에 잘 담아두고 있었어. 네 얼굴도 잘 모르면서 이토록 미안해하고, 후회하고, 그리워하며 글을 쓴다는 게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해. 나만 이상한가? 원래 어른이 될수록 혼자만의 감정에 자주 빠져드는 거야. 너도 곧 나처럼 잊지 못할 사람이 생기게 될지 몰라. 우리가 만난 게, 차라리 그때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한 점이 많지만, 대답을 들을 수 없어서 슬프지는 않아. 내가 너를 알고 있고, 너를 응원할 수 있고, 좋았던 추억을 꺼내볼 수 있으니까. 그 자체로 감사함을 느껴보려고 해. 네가 행복하면 그걸로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아. 시후야 그때의 너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선명한 아름다움이었어. 나를 계속해서 부르던 목소리는 지금까지도 마음을 울리곤 해. 이제는 네가 없어도 네 목소리를 들을 수가 있어.

네가 날 부를 때면, 반에 앉아 골똘히 수업에 참여하는 아이들이 더 사랑스러워 보이기까지 했어. 그런 너에게 그날의 선생님은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것 같아. 끝나고 짐을 들어주겠다 말하던, 너의 멋진 용기를 그저 흘려보냈다는 사실이 자꾸만 마음을 건드리곤 해. 그래서 가끔 멋대로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 나란히 짐을 나눠 들고 촘촘한 계단을 지나쳐, 교무실 문 앞에서 환하게 작별 인사를 나누는 우리의 모습을 말이야.

내가 네 이름을 기억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머릿속에서 떠나보내지 못하는 형체를 구체적으로 부를 제목이 없다는 건 너무나 슬픈 일이기 때문이야. 시후야, 부족했던 나에게 깨끗하고도 과분한 마음을 줘서 참 행복했어. 그때 네게서 묻어나던 웃음, 아기자기했던 그림체, 또랑또랑한 멜로디까지. 앞으로도 잊지 않을게. 전부 기억할게.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했던 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멀리 떨어진 어느 곳에서 선생님은 너를 응원할 거야. 그러니, 너를 이렇게나 응원하고 아끼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이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 줘. 아프지 말고 밥도 잘 챙겨 먹고 더 씩씩해져야 해. 많이 고마웠어 시후야. 이만 줄일게.

- 꿈그림 선생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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