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아낙네의 슬픔_2
다시 만나자, 갚아줘야 할 빚이 있으니.
<전 편과 이어집니다.>
***
남자의 의미심장한 주술과 함께 장면이 급속도로 전환되었다. 내가 주인공인 전생 영화의 다음 씬은 평범한 가정집인 듯했다. 그곳에는 가장 행복했던 순간의 내가 살아있었다. 상냥하게 꾸며진 실내 안에서, 깔끔하게 꾸며진 주방과 보드라운 온도의 거실을 넘나들며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을 하고서. 이 시대에 발을 막 내디뎠을 때에는 분명 한국일 거라 확신했는데, 안겨있는 집은 약간의 서양빛을 머금은 느낌이었다. 서부 작품에 나올 것만 같은 황야 위의 그윽하고 소담스러운 집이랄까. 따뜻하고 온화한 주황빛이 감도는 내부 그리고 곧이어 들려오는 아이들의 청량한 웃음소리. 그 안의 나는 천상의 보물을 지닌 사람이었다.
넋이 나간 채로 백일몽의 찰나를 즐기다가도, 내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내 모습을 보는 게 새삼 낯간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머무는 세계에는 독보적인 사랑스러움이 에메랄드 물결처럼 넘실거렸다. 누구나 꿈꾸는 가족과의 화목한 풍경. 아이들은 내게 환한 미소를 뿌리며 각자의 이야기보따리를 털어놓느라 바빴고, 나는 그에 화답하고자 서둘러 앞치마를 두르고 간식을 내어주기 위한 정성의 묘술을 펼쳐냈다. 그토록 말랑한 구름 위를 걷는 중에, 한 남자가 눈에 띄었다. 나는 단숨에 직감할 수 있었다. 그가 내 남편이라는 것을. 튼튼하고 단단한 체격에 우리를 애정으로 바라보는 초면의 남성을 나는 깊이 의지하고 있었다. 아마도 평소처럼 익숙하게 그를 사랑하고 있었을 거다.
시간을 슬쩍 가늠해 보니 이른 오후 같았다. 네 식구의 온화한 웃음소리가 집안을 가득하게 빈틈없이 메우고 있었다. 어떤 것도 평화를 깰 수는 없을 거라고 장담했다. 나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은 가족과 지내는 시간이었다는 걸 은연중에 깨달은 지점이었다. 현실의 꿈과 비슷했기에, 어느 정도 납득이 쉬워지자 전생의 삶에 신뢰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절대로 벗어나고 싶지 않을 만큼 찬란한 기록들이 계속되었다. 하나 자비 없는 시간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흘러갈 것이다. 제아무리 누군가 설계한 최면술에 의해 형성된 세계라고 해도, 언제까지나 그곳에 숨어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끝이 있다는 것은 당연한 처사였기에.
또다시 머나먼 남쪽 천장의 부름이 내 귓가에 닿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가장 슬펐던 순간으로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해도 무슨 수를 써서든 그는 나를 아픈 시간에 데려다 놓을 것이었다. 생의 끝자락으로 흘러가는 운구차 안에서, 마냥 즐거워 보이는 그곳의 나를 바라보자니 몹시 안쓰러웠다.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시공간의 바깥에 누워서 겸허한 마음으로 화면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것뿐. 그런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의 그것처럼 장소부터 주변의 인물까지 모조리 바뀌어야 하는데, 드라마 현장의 세트장 같은 나의 집에서는 어쩐지 조금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무언가 잘못된 걸까?
어딘가 불길한 느낌이 들던 그때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이 여전히 함박웃음을 짓고, 평생의 배우자가 나를 맑고 투명한 눈동자로 바라보던 때. 현관문이 홀로 들썩거리더니 크게 철컥대며 오래된 걸쇠 풀어지는 듯한 인기척이 들려왔다. 이윽고 문이 열리자, 어떤 남자의 다부진 형체가 보였다. 그는 금방이라도 일을 저지를 태세의 거센 몸짓을 하고 서있었다. 그리고 쓸데없길 바랐던 의심은 곧 현실이 되었다.
본인만의 계산으로 촘촘히 둘러싸인 남자는 재난처럼 들이닥치며 순식간에 아름다웠던 울타리 안을 덮쳤다. 그러고는 별안간 모든 것을 앗아갔다. 내 아이와 남편은 그의 손에 쥐어진 낯선 흉기에 뼈도 못 추리고 목숨을 잃었다. 그동안 나는 무얼 하고 있었지? 갑자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생각을 해야 하는데 눈앞의 광경이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삽시간에 엄청난 일들이 벌어졌음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냥 무력하게 서있었다.
씻을 수 없는 막대한 일을 벌이고도, 남자는 임무를 마쳤다는 듯 뿌듯한 얼굴을 하고 어느새 서늘한 온기로 돌변해 있는 내 집을 황급히 떠났다. 그제야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아예 미쳤는지도 몰랐다. 일단 남자를 따라가야 했다. 가서 붙잡아야 한다. 당신이 앗아간 만큼 당신도 빼앗겨야 하니까. 억울하고 고귀한 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복수를 해야만 하니까.
나에겐 눈물 흘릴 시간조차 사치였다. 집을 나서기 전, 대충 손아귀에 닿아오는 작은 무기를 하나 꺼내 들고 남자를 찾아 무작정 거리를 내달렸다. 그동안 나를 제외한 주위가 수십 개도 넘는 배경으로 꿈틀거렸다. 이 세계의 살아있는 것들이 전부 원망스러웠다. 나는 휘청거리는 갈대들 사이로 거칠게 바람을 헤집으며 발길을 재촉했다. 허망하게 울어재끼는 것들이 갈대인지 나인지 모를 정도로 아픔이 몰려와서 그대로 바스라질 것만 같았다.
지긋한 갈대밭이 사라진 뒤에는 뾰족한 가시밭길이 나타났고 나는 가시를 짓이기고 내팽개치며 계속해서 나아갔다. 더러운 강물을 헤엄치고 표독스러운 지뢰밭도 뛰어넘었다. 오직 하나의 목표에 길들여진 사람처럼. 주저할 여유가 없었다. 가족을 무자비하게 앗아간 그놈을 찾아 내 손으로 직접 처단해야만 했다. 형용할 수 없는 고통에 비해 턱없이 짧았던 행복이 되살아날 때마다 분하고 서러운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얼마쯤 지났을까. 정처 없이 주제 불분명한 길을 걷다 보니, 나는 맨 처음의 갈대밭에 서있었다.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잠시 멈춘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내 늙은 신발과 조금 떨어진 곳에 무언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놈이었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단 한 번의 시도로 끝낼 것이다. 오로지 그놈의 목숨을 거두기 위해 달려왔으니. 아픔을 달래는 정당한 방법이 아닐지라도 그것만이 내 사람들을 지키는 유일한 애도라고 생각했다. 당한 대로 똑같이, 아니 그보다 더 끔찍하게 갚아주고 말 것이다.
나는 몇 번의 숨을 고르다가 그놈의 뒤로 살금살금 다가가 회심의 한 방을 노리며 재빠르게 몸을 날렸다. 그러나 자신보다 훨씬 커다란 덩치와 힘을 지닌 남자를 혼자서 당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는 마치 다 알고 있었다는 듯, 볼품없는 여자의 공격을 가뿐히 피하고는 도리어 둔탁한 주먹으로 몇 차례 반격해 왔다. 그의 손에 처참히 무너지는 허탈하고 어리석은 내가 보였다. 일정한 속력의 터치감에 정신이 희미해지며 아득해질 무렵, 그놈의 몸에서 내가 굳게 믿던 남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를 이곳으로 인도한 눈물겨운 그리움의 음성이었다.
당신이 죽는 순간으로 갑니다.
한마디 매서운 예언이 끝나자, 그놈은 평생을 기다린 사람처럼 힘없이 고꾸라진 내 등에 길고도 날카로운 것을 꽂았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복수는커녕 맥없이 당하기만 하다가 씁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 나의 최후. 억울했고, 이루어 표현 못할 만큼 커다란 상실감이 나를 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나는 죽었다. 평행선에 존재하던 나라고 불리는 모든 삶의 언저리가 무너지고 말았다.
잔인한 마무리에 도달하자 거짓말처럼 저절로 눈이 떠졌다. 힘겹게 떠진 눈결 아래로 짜디짠 이슬들이 방울져 흘러내리고 있었다. 온 마음으로 느낀 것들이 정말 내 전생이 맞는지, 스스로 만들어 낸 상상인지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심하게 이입되는 감정들이 생생하게 숨 쉬었고, 더는 못 견딜 정도로 애가 탔다. 왜 이따금 현관문을 뚫고 들어올 낯선 이를 두려워했는지 놓쳤던 퍼즐이 끼워 맞춰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야말로 끼워 맞춘다는 표현에 불과했지만, 대놓고 겪어본다면 전혀 믿을 수 없을 일이라고 말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제2의 세상에서 함께 가정을 이루었던 이들을 떠올리면, 체한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고 깡통같이 비어진 마음이 저릿해진다. 가끔은 내 모든 것을 앗아간 그놈에 대한 앙갚음을, 현실의 생에서 꼭 성공하고야 말겠다는 날것의 공연한 다짐도 품어보았다.
포근했고 처절했던 어느 시절, 그저 가족이 전부였던 젊은 아낙네의 심장 깊숙이 얹혀있을지 모를 억겁의 슬픔을 내 힘으로 달래주어야 할 것만 같아서. 수없는 계절을 떠나보낸 지금까지 그 서글픈 시름이 마음 한 구절에 남아있어서. 나는 아직까지도 완벽한 복수가 될 당신과의 재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