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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나잇 Mar 23. 2023

엉망으로 씁니다

적어야만 털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일.

나의 옛 애인은 슬픔의 빈도가 잦은 사람이었다. 만남을 삼 개월 정도 이어가던 차에 그는 자신이 가진 아픔을 내게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내가 알고 보듬어주길 바란 게 아닐까 싶었다. 나는 그의 사연을 듣고 내가 조금 더 특별해진 것 같아 낯선 황홀함을 만끽하다가도 금세 슬퍼했다. 그의 적나라한 감정들이 여과 없이 나에게로 기울어졌기 때문이었다. 평소 내 이야기를 잘하지 못하는 성향의 나는 솔직한 형태의 사랑스러움을 내뿜는 그를 숨도 못 쉴 만큼 보드랍게 안아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되짚어보면 우리에게는 비슷한 부분의 상처가 있을지도 몰랐다.


몇몇 세계의 연애가 그러하듯이 시작이 꽤 순조로운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면서도 소중했고, 그러면서도 간질거렸다. 나는 누군가를 무언가를 한번 사랑하면 사정없이 아껴주는 경향이 있어 그야말로 사시사철 내 등에 그 대상을 업고 다니려 했다. 멀리서 조용히 바라보는 법은 내가 잘 모르는 방식의 사랑이었다. 내내 혼자의 삶을 살던 내가 기꺼이 둘의 삶으로 뛰어들었다는 것은 아주 큰 결심이었다. 말도 안 되는 변화였으며, 흔치 않은 도전임에 틀림없었다. 꾸만 달라지는  모습이 낯설고도 좋서. 살랑거리는 미소를 그의 앞에서 혹은 가족의 앞에서 배실배실 빈번히 흘렸다.


너와 내가 우를 잘 살피고 싶어 하던 무렵. 그가 내 곁에서 우는 시간들이 연속의 탄력을 받아 하염없이 폭발하 중이었다. 정을 단도리할 틈도 없어 보였다. 그런 그가 가끔은 멈출 수 없는 수도꼭지 같았다. 헤어짐이 슬퍼 울었고 자신의 개인사 때문에 울었고 인간관계나 직장 생활 때문에 울기도 했다. 그 옆에는 어김없이 따라 우는 내가 있었다. 어느 순간에는 그가 먼저 울지 않았는데도 울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사랑을 하면서 사랑만 물드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던 것 같다. 사랑이 가진 우울은 무서울 정도로 나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항간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길가에 떨어진 아픔이 그의 아픔인지 나의 아픔인지조차 분간이 잘 되지 않았다.


눈물은 행동이 민첩한 녀석이었다. 한번 굳게 자리 잡고 나니 몸을 빌려 급속도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때때로 그가 조그마한 알약 몇 개를 먹고 잠드는 것에 안쓰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얼마나 힘들면 그럴까. 날카로운 돌덩이가 가슴께를 죄다 찢어놓는 기분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을 심정으로 수면의 환상에 의지해야만 하는 그가 애처롭고 가여웠다.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연민은 또 다른 이름의 사랑인지도 몰랐다. 주위의 통상적인 장기 연인들처럼 나 우리가 오랜 시간을 서로의 고리로 매듭지어질 거라 호언장담하곤 했다. 하나의 걸쇠만 걷어내면 풀리는 가벼운 자물쇠라고 생각한 적은 상상에서도 없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내가 그의 앞에서 억지로 울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들을 때마다 매번 눈가를 시큰하게 했던 언어에 더 이상 마음이 동요하지 않았으며 그를 바라보는 내 얼굴의 표정이 점점 하나의 무채색으로 옅어지고 있었다. 원래 어떤 빛깔이었는지 기억나질 않았다.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조금 생겼던 나는, 그가 나와 함께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잠에 빠져 지낸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하나, 그는 사실 처음부터 그래왔다. 그렇다면 변한 것은 나였다.


조금이라도 더 붙어있기 위함이었다. 그가 피곤한 찰나도 다독여주고 싶었으므로. 곁에서 살뜰하게 보살펴 주고 싶다는 사랑 그뿐이었는데. 그게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하여 같이 존재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내 뒤통수를 둥둥 두들겼다. 어느새 구겨진 패턴으로 그의 옆에 숨죽여 있는 나는. 계속해서 빈 껍데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본래도 이렇다 할 알맹이가 없는 사람이었는데 더 격렬하게 없어지고 있었다. 서로 행복하고 싶어서 만나는 관계였으나, 행복보다는 희생의 느낌이 크게 다가왔다. 약간 정신이 들은 후에는 그의 우울이 너무나 무거운 짐이 되어 내 목을 조르는 중이었다.


한 번은 그가 약을 먹고 깊은 수면에 빠져 데이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적이 있었다. 매우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약속 시간이 훌쩍 지나고서야 미안하다며 연락을 준 그가 달갑지 않았다. 약을 먹어야 잠들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고는 있었지만. 그가 아프고 힘들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잘 알아줘야 할 사람이 나였지만. 내가 늘상 보는 그의 모습은 잠든 모습이었다. 모두 그만두고 싶었다.


그가 약을 먹어서 잠들었는지 아니면 잠들 수 있는데도 습관처럼 약을 먹었는지, 고작 몇 시간 뒤 나와의 만남이 예정되었다는 상황인지하면서도 약을 먹어야만 했는지. 하루 정도는 나를 위해 매끈한 정신으로 견뎌줄 수 없었는지. 결국 혼란스럽고도 이기적이고 미심쩍은 마음을 갖는 데까지 이르렀다. 나쁜 생각이었지만 그의 옆에서 언 동상처럼 굳어있는 내가 불쌍하게 여겨졌다. 아무래도 그의 우울이 쌓이고 쌓여 스멀스멀 내게로 옮겨진 모양이었다. 나는 이리도 저항 없 무참하게 잠식되어 버리는 걸까. 길을 잃은 지점에서는, 누구라도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그가 앞뒤 없이 흘려내는 눈물이 서서히 내 인생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숱한 대화에서는 우리의 관계가 뒤틀리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매섭게 찢어지 갈라지는 재앙 같기도 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우리는 아마 헤어졌을 것이다. 그와 내 사이에서는 내가 그를 버린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나는 억울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그저 딱딱한 나무토막처럼 일상을 보냈다. 몇 년이 지난 뒤에도 내가 불안감을 느낄 때마다 어김없이 그는 내 꿈에 나타났고. 나는 꿈에서조차 대적하는 게 두려워 그가 없는 곳을 찾아 은신했다. 좋았던 기억도 있었겠지만 크게 마주하고 싶지는 않은 얼굴이었다. 지우고 싶은 기억만 선택적으로 지워준다는 어떤 영화처럼, 그에게서 내 기억을 지우고, 나에게서 그의 기억을 지우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도 있었다. 한동안 누군가를 아끼고 예뻐하고 살갑게 챙겨주지 못하게 되었다. 그의 말마따나 내가 사람을 버리게 될까 봐. 버린 건지 버림받은 건지 알 수 없는 만남을 시작하는 게 겁나서. 어쩌면 그만 울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내 아픔은 나도 안기 버거운 것인데, 감히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아픔까지 끌어안으려 했다는 과오가 밀려와 몹시 괴로운 적이 있었다. 사랑은 왕왕 상처를 주는데도. 상처조차 사랑인 줄로만 느껴지는 순간에는 별다른 묘안이 없었다. 그저 몸이 부서져라 사랑하는 수밖에는. 어쩌면 기한을 모르는 시한부 같은 사랑을 우리는 곧잘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만둘지 말지의 여부는 의사나 다른 이의 능력이 아닌 개개인 마음의 온도에 달렸을 테니까. 나는 비슷한 사태를 이끌어내지 않고 싶었다. 오래 신중해지기로 했다. 그러다 보면 사랑이 무엇인지 잊는 때가 더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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