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관계

후회와 미련의 종착역은 다시 돌아가는 일일까.

by 블루나잇

사랑하는 것을 뒤로 미루지 마, 그건 사랑을 찾지 못한 것보다 더 슬픈 일이야. 그들은 언제까지나 너를 기다려주지 않아. 후회할 땐 이미 늦지. 앞으로만 달리던 시간이 더 이상 흘러가지 않는다면, 잠시 뒤돌아봐. 지금 네 곁에 누가 있어? 진정으로 네가 원하던 삶이었어?


푸른 녹음이 짙은 짐승의 울음을 내뱉는 여름날 정오에, 우리는 벤치에 앉아 철 지난 프랜차이즈 카페의 다 쓰러져가는 커피를 입 안으로 굴리고 있었다. 쌓인 오해만큼 시간이 뒤로 가는 기분이었고, 어쩌면 더 이상 대화의 간극을 좁히지 못할 것 같다는 우려는 불쾌하고 미지근한 바람이 되어 미세하게 자라난 의심의 씨앗을 건드리는 듯했다. 당신의 생각이 틀리고 내 생각이 맞다고 말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내 생각이 맞다면 당신 생각이 맞을 수도 있는 거고, 알고 보니 둘 다 엉터리였을 수도 있는 거고. 우리는 무수한 옳고 그름 속에서 당연하고 당연하지 않은 의견들로 관계를 유지해 나갈 뿐이었다.


슬픔은 그저, 우리가 멀어지는 결괏값이 어딘가에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 어떤 여자는 그게 가장 두려웠고. 또 다른 여자는 화마에 길들여져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불씨를 내내 들썩이고 있었다. 누구의 잘못인지 알 수 없어진 채로 계절이 흘렀다. 발밑으로 흐르던 여름 바다의 까슬까슬한 모래사장이 자연스레 주황과 노랑의 혼합물인 단풍밭이 되고, 그 단풍밭이 잘게 으스러져 희끄무레하며 연약한 눈으로. 버석버석에서 푸석푸석의 굳어진 음성어로 변할 때까지. 그들은 여전히 하나의 다른 마음에 같이 머무르고 있었다.


이해한다는 건, 사랑한다는 뜻이야? 사랑해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어. 당신과 내가 다르다는 걸, 애초부터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는 걸. 우리는 꼭 알아야만 해.


서로를 가여워하는 사람들 앞에서, 내가 너를 가여워하는지 모르고 그저 사랑이라며 줄 없는 번지점프 같은 허공의 말을 내뿜던 나. 우리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던 우리가 자주 하던 말은 이거였잖아. 행복했으면 좋겠다. 제발 행복하자. 아프지 말자. 펑펑 울어도 좋으니, 살아있자.


우리가 사랑이 아니라면, 뭐가 사랑이겠어.


너는 알고 있었을까. 가끔 텅 비어있던 눈동자도, 의무적으로 대답하던 낮은 음성도, 얕게 흩어진 퍼즐 조각처럼 네게서 도망치려 하던 어두운 내 그림자도. 너는 그런 나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불안했을까. 아니면 내가 사라지지 않아 다행이었을까.


찢어졌다 다시 붙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흔적이 아물기 전, 또다시 뜯어지는 비일비재하고도 악취 같은 본능적 만남에 지쳤을 뿐이다. 당신과 나는 서로를 기억하는 좋은 친구였고. 둘도 없는 단짝이었고. 이제는 어떤 관계로 정립될 수 있는 사이가 아니라 해도. 우리는 언젠가 엷은 미소로 안부를 주고받으며, 마음에도 없는 보고 싶었단 말을 꺼내야 하거나. 혹은 미워진 서로를 영영 바라보지 않기 위해 한쪽이 다른 세계로 몸을 숨겨버리거나. 복잡한 감당을 앞두고 선택지가 고작 두 개 남짓인 사실을 억울해하곤 했을 것이다.


나는 아주 오랜 이별과 긴 우주를 건너는 상상에 걸쳐, 너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지난 추억들이 많아서 이따금 행복할 거고, 추억들 중엔 아픔이 더 커서 왕왕 슬픈 눈을 하겠지. 그리고 너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를 테지만. 빨랫줄에 늘어진 우리를 보고 우리는 어떤 기분을 느낄까. 아무것도 모를 거야. 그때의 나처럼, 그때의 너처럼. 알 수 없을 거야. 나는 네가 나에게 아무 말도 건네지 않기를 바라. 두려움이 급속도로 몰려오는 날에도 그래서 벗겨진 껍데기만 함께인 날에도 어김없이 다른 곳을 바라보았던 것을 기억하니까.


어긋난 관계를 수선하는 일은 아무래도 쉽지 않겠지.


그럼에도, 다시. 다시 나는 몇 년 전의 나로 돌아가서. 너는 몇 년 전의 너로 돌아가서. 유년의 푼수 같은 웃음과 어정쩡한 나이와 바보 같은 성격들은 잃은 지 오래라 해도. 우리가 우리가 아니라 해도. 괜찮아. 괜찮을 거야. 나는 이제 네가 밉지 않아. 그런 감정들은 어느 옛날 너와 내가 뛰어놀던 앞마당 위로 주욱 늘어진 흙바닥을 아득할 만큼 깊숙이 파서 묻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긴 시간 내린 회색 비가 불어나고 넘치다 못해 피어난 너른 바닷물에 쓸려갔을 수도 있을 그 마음을. 내가 닫혀있는 동안, 너도 힘들었을 거라는 걸.


그때의 나는 이제 없지만, 네가 슬퍼하지 않았으면 해.

행복을 응원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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