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뚤빼뚤한 글씨처럼 사계절의 옷가지가 뒤섞인 채 방안을 적적하게 감돈다. 꾸준함을 지겨움으로 금세 갈아치운 너는 모로 누워 가만히 나를 응시하는 중이다. 사랑이 발을 빼고 도망친 눈빛으로. 내가 조금 느려서, 천천히 걸을 줄 알아서, 당신이 아닌 남들에게는 무관심해서 좋다던 낱말들을 이제는 전부 먹어치웠다. 우리는 그렇게 먹어 치워졌다. 모든 건 순식간의 일이다.
마음의 빈 구멍은 가끔 블랙홀 같아서 무엇으로도 그 안을 채울 수 없었다. 들여다보고 직시하는 것부터 머저리처럼 겁을 내곤 했다. 시커먼 냉동 창고 같은 곳을 점거할 수 있는 사람은 부족한 점보다 잘난 점들을 알아주는 어딘가에 존재할 사람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마저도 알 수 없는 유효기간이 있다는 것. 어쩌면 오래 어쩌면 금방 끝나겠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마음이라는 것을 기대고 내어주고 안겨주었다. 믿을 구석이 그것뿐이었으니까.
어느 순간부터 사람을 의심하는 습관이 생긴 것 같았다. 말은 쉽게 전이되는 것이라 순간의 기분을 좋게 만들면서 동시에 불안감을 옮겨주지 않던가. 웃는 입꼬리와 상반되게, 심장 안쪽의 가장 말랑한 부분은 해저 십오 미터 아래로 깊숙이 빠진 잠수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신 못 차리도록 휘둘리다가 멍한 어항 속의 물고기로 급락되기 일쑤였다. 신경이 쓰였다. 나에게 다가온 너라는 수많은 사람들이. 누구도 출입할 수 없도록 날을 세웠던 나의 심연이라는 공간이.
사랑이 많은 사람은 사랑이 적은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랑이 어려운 사람은 사랑이 흥미로운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랑이 두렵지 않나요? 라고 묻는 사람에게 사랑을 즐기는 사람은 이렇게 답했다. 죽을 게 두렵지 않나요? 두려우면서도 우리는 살아가지 않나요? 그런 거예요. 어쩔 수 없는 거죠. 다가오는 것을 지레 겁먹고 내치는 건 행복을 버리는 일과 마찬가지예요.
그렇다면 그 행복은 보장이 되는 행복입니까? 행복인 줄 알고 실컷 쏟았는데, 그 안에 상한 우유 같은 퀴퀴하고 속상한 덩어리가 가득하면 어쩌죠? 나는 어떻게 하면 좋죠?
전부를 주지 않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바늘이나 가시처럼 따갑다. 마음먹는다고, 행동한다고 다가 아니다. 어떤 성향은 지독하게 신중해서 신중한 만큼 상처를 덜 받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런 부류의 인간들은 자신이 생각한 만큼의 거리에 도달할 때까지 홀로 어마어마한 믿음을 쌓는다. 그 신뢰를 받아줄 인간이 좋은 인간이라는 보장은 없다. 더 많이 우는 쪽은 결국 더 많이 사랑한 쪽이 아닐까. 지긋한 생각이 빗줄기처럼 꼬리를 물자 심경에 금이 가듯 실금 같은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단 하루라도 복잡하게 살고 싶지 않아졌다.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할 수 있다면, 나는 당장 내가 싫어하는 모든 일거리를 받아 통장 잔고부터 불리고 싶었다. 그러나 일어나지도 않은 사건에서 의미부터 찾는 나로서는 천 퍼센트 확률로 불가능한 일이다. 하고 싶지 않아서. 마음이 허락하지 않아서.
나는 자주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누군가 나를 끌어내려고 할 때마다 거절하는 행위에 열과 성을 다했다. 언젠가 나를 찾지 않는 시간들 속에서 상처받는 날이 올지라도, 바깥세상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좀처럼 들어서지 않았다. 정신이 미친 어느 날에, 급하게 몸을 흔들고 싶거나 세상 모든 흉을 전부 겪어보고 싶다는 반짝의 용기가 생겨난다면. 그럴 때면 몇 없는 연락처 목록을 탐색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에 맞춰 욕망의 가무를 함께 춰 줄 사람이 필요할 것만 같았다.
그런 사람은 그냥 그런 사람. 인정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대개 많은 이들은 저 사람은 왜 저런 사람일까 하며 의문을 가졌다. 궁금증도 하나의 관심이라고 하지만 그 관심이 독성을 품고 타인을 해할 목적이 조금이라도 갖춰졌다면 위험한 시선으로 비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물결 한 줄 튕기듯 쉽게 보내는 입장에서는 기를 써도 알 수가 없을 것이다. 받는 입장의 상처를. 그 안에서 점차 넓혀나갈 슬픔의 반경 범위를.
예쁜 것을 예쁘다고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들. 주변을 돌아보니 생각보다 꽤 많아 보였다. 그들에게는 더 중요한 것이 있거나 혹은 아무것도 중요한 것이 없었다. 가득 채워졌거나 텅 비워져 있었다. 비슷해 보이지만 달랐고 달랐지만 크게 다를 것 없었다. 장점이 영원한 장점으로 남을 수 없고 단점 또한 나쁜 구석만 갖고 있는 까만 생명체는 아닌 것처럼.
당신이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마음, 눈길. 그 둘러싸인 녹음의 생태계가. 푸르고 푸르지 않은. 그저 숨만 쉬는 것들로 인해 예쁘고 예쁘지 않은 것을 단정 짓는 세상. 필요를 통해 눈이 멀어버린 메마른 어떤 상념들. 그리하여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아졌다.
마음이 배부르지 않아 배불릴 무언가를 자꾸만 좇을 때. 나는 이따금 우리의 버들잎 같은 순수한 시절을 떠올린다. 웃음 하나로 해결 되었던, 서로를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한 단상으로 밤새 골머리를 앓았던. 네가 나를 바라보고 내가 너를 바라보았던. 초점이 또렷한 맑은 눈동자. 작고 수줍은 보조개. 사라져도 좋았던 사랑. 그것만으로 알지도 못하면서 들먹이기만 하던 온 우주는 일순간 우리의 것이 되었다. 그러면 조금 편안해졌다. 우리는 잠시 기억과 시간을 멈춰놓고 은빛 점들이 무수한 강가 앞에 마주앉아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다.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