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걷던 길의 경로가 어느 날은 갑자기 생각이 나질 않는다. 처음 본 장소처럼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고. 싫은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냥 자연스레 가고 싶지 않아진다. 지긋하고 모두 그만두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지만, 그 죽음을 누구에게도 알릴 수 없어 결국 사랑의 잔해를 조금씩 먹어 치우게 된 사람의 이야기를 읽고 있다. 그의 손톱 발톱을 정갈하게 깎아 입 안에 털어 넣고, 머리카락을 돌돌 말아 주저 없이 자신의 입으로 관통시킨다. 내 안에 그가 살아있다고 믿으면서. 나 자신이 살아있는 한 그도 살아있는 거라고. 헤어지지 않을 유일한 방법은 내가 그를 먹는 것. 내 몸의 일부로 흡수시키는 것. 당신을 위한 일이니까.
소설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애절하고 기이한 사랑의 정도를. 먹지 않아야 될 것을 먹는다는 행위부터 이질감에 더불어 목구멍 속으로 타들어가는 이물감이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진다. 뜨거운 장난 같은 사랑 한 소절 겪어 본 적 없는 사람처럼 한낱 거북함으로 넘겨짚으면서도. 멈추지 못하고 계속해서 활자를 곱씹는다. 그를 털어 넣은 그녀처럼, 내가 나에게 지겨운 사랑을 닮은 기억들을 털어 넣는다. 어떤 이들은 모조리 삼키는 사랑을 두고 얼마나 슬픈 눈물방울의 기대를 품게 될까. 진정한 사랑의 결말이라며 부러워하게 될까.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상실이다. 무엇으로도 마음의 공허를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 내적으로 본인이 본인의 부족함과 풍족함을 이해할 수 있어야만, 그리하여 삶의 이유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인정해야만 갈증을 풀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 쉽겠는가. 마음의 병이 영영 사라지지 않는 이유들도 여기에 있다. 알면서 치유할 수 없는 것. 어쩌면 그러할 마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
나는 가끔 내가 아팠으면 했다. 지독하게 아파서 일어날 수조차 없었으면. 그런 핑계를 대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었으면. 오랜 시간을 무기력이라는 감옥에 살고 있는 듯해서. 감시하는 자는 없지만 계속해서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나는 존재하는 듯해서. 예쁜 것을 보고 행복할 수 있다면 좋겠다. 예쁜 것을 보고 오래 감동받을 수 있다면 좋겠다. 예쁜 것에 질려하지 않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 아직 한참 모르는 것 같을 때, 눈물조차 메말라 갈 곳을 잃었을 때. 걸어야 할 길을 내게 알려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동안 우리가 살아있는 날이 좋았다. 날씨와 배경이 좋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와 별개로 독한 미세먼지가 뿌옇게 하늘을 덮고 있었다. 서로를 시기하고 질투하며 이유 모를 비판이 난무하는 시절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만 그렇게 느껴졌을지도 몰랐다. 슬픔을 부르는 사람에게 유독 슬픔이 자주 당도하는 것처럼. 나는 사람이 금세 좋기도 하고 또 금세 싫기도 했다. 이면을 알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그리고 나 또한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점이 생경하면서도 견딜 수 없게 갑갑했다. 어느 날은 참지 못하고 엄마에게 말했다. 내가 너무 징그럽다고.
아무도 만날 수 없었고,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일터에 나가면 참았던 가식 웃음을 마구 내뿜고서는 터덜터덜 모자란 빈 수레가 되어 돌아왔다. 그러고 나면 희한하게 속이 조금은 풀렸다. 그리고 조금 많이 허전했다. 마음에 구멍이 난 것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은 기분이었다. 당장은 앞에서 웃어도 금세 서로에게 귀찮거나 피곤한 일이 닥치면 석상처럼 굳어질 표정들에 마구잡이로 뒤섞였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무서웠다. 오래 머무르면 안 될 것 같아 서둘러 마지막 버스에 몸을 맡겼다. 그런 날들이 숱했다. 탁하고 어지러운 아지랑이 같았다.
알 수 없는 피해 의식에 잠식되는 동안에도 나는 어김없이 살아있었고. 그저 평소보다 조금 예민한 날에 뱉어지는 글은 자책과 불만과 어쭙잖은 핑계 혹은 새카만 원망 같은 것들로 가득해졌다. 토해내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은 날들이 있었다. 가슴에 얹힌 게 너무 많아서, 답답해서. 누군가가 가시 하나만 빼내주면 괜찮을 것 같은데.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 알고 보니 내가 모두 내친 것이었을 때. 다시 생각한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 내가 좋아했던. 나를 좋아하던 사람. 이제는 없는 사람. 아무리 지겨워도, 그럼에도 나는 사람. 내가 다시 사랑하게 될. 사랑했던. 그런 밉고도 아름다운 사람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