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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나잇 Nov 27. 2023

예약, 예열, 예전, 우리

세상이 뒤집힌 순간

더 이상의 비상은 없다

추락과 절규만 남았을 뿐

너도나도 예상치 못한 재난에

혼비백산 뒤섞이기만 할 뿐

더 이상의 희망은 없다

마음엔 몇 자의 글이 적힌다

예약, 예열 그리고     


달력이 넘어가고 찢어지고 돌아오고

숫자를 세어보는 손틈새로

거꾸로 뒤집어진 빛 한 줄기가

이른 소원을 들어주려고 다가왔다가

사람들의 얼굴이 환희로 바뀌자마자

부담스러운 행색으로 떠나버리는

살아생전 찾아뵙지도 않았던

어머니 아버지를 부르는

다 커버린 몸집의 아우성들

그들의 머릿속에는     


그리고 예전,

그리고 우리

수억 개의 낱말과

수천 개의 숫자를 입력해도

뒤집힌 현실은 현실일 줄을 모르고

사람들은 늦은 각성으로

낫부터 낮부터

밤부터 밭부터 갈고닦고

새 아침을 기도하고 쌀을 씻고

틈이 나면 사랑 같은 것도 좀 하고

어영부영 살아내려고     


왜 욕심이라고 하십니까

마치 무너지기를 바란 사람, 아니 신처럼

우리는 그렇게 나약하지도

하나, 미치도록 행복할 수도 없는 숙명을

지녔음에도 지냈음에도 바랐음에도

버틴다는 표정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

잔혹한 형벌이라고 마음먹기보다는

쓰라린 축복으로 안고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없었던 힘을 키우려는 겁니까     


수도꼭지를 틀었더니

하늘에서 사방으로 물이 튀어내린다

목숨을 내팽개치듯

영하의 바람이 부는 날이면

물방울은 크고 작은 알갱이의 꿈을 꾸고

숨을 쉬는 이들은 천과 쇠창살을 조곤조곤 엮어

머리 위로 내리는 축배를 막아낸다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진정 그들은 모르면서도     


어제도 쌀을 씻었고, 밥을 지었고

물을 막았고, 얼음을 지켰고

머릿속엔 예약, 예열

그리고 예전

우리까지 떠올리다가 찾아온 두통

돌아가지 못할 거라는

쌀알 한 움큼의 절망과

그럼에도 라는 단어를

잊지 않겠다는 손톱 반틈의

의지를 엮어서     


오늘은 사람들이 마을 광장에 모여

숫자 십일을 적어놓고 귀퉁이를 야금야금 삼켰다

이별이 아쉬운 이들은 방에 틀어박혀 눈물샘을 채웠다

수돗물의 역행에는 비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여전히 몇은 후련함에 웃고

몇은 미련에 우는 사이로

얼음이 새겨지는 것은 눈

얼음이 새겨지는 것은 눈

눈에 살포시 닿자마자 제자리로 돌아가는 얼음


언제부턴가 우리는 하염없도록

신에게 넘겨받게 될

미래의 예약을 기다리기만 하면서

되찾을 것이라 읽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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