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선물로 받은 갈색 털양말이 남아있다. 곰인형을 닮은, 그런 하루였다. 마음까지 보슬보슬해지는 기분 좋은 설렘이 방 안을 가득 채워서, 그 안에 폭 빠져 무엇이든 담글 수 있는 것은 폭삭 담그고 싶어지는 날. 육체와 정신이 한없이 바스러진다 해도 누구도 탓하고 싶지 않은 날.
그 사람이 보낸 문자는 오래된 핸드폰 속에 남아있고, 나는 오래된 핸드폰처럼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지. 화이트 크리스마스예요, 눈이 오네요. 닳고 닳아 종이였다면 모조리 흩어졌을 법한, 수년 전에 수신된 메시지를 읽고. 그제야 바깥을 돌아본다. 살면서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은 삶이었는데, 누군가의 말마따나 축복 같은 날에, 선물까지 안고 잠들 수 있음을 내게 알려준 사람. 그리운 눈이 쌓이고 쌓여서 다 녹고 난 액체는 자연으로 돌아가 달콤한 눈물이 될 것 같은 그런 날, 그런 시간의 흘러가는 오후에 잠겨.
내 삶이 그저 그렇다고 말할 때 보았던 당신의 표정을 자주 기억해요. 붉어진 눈시울마저 아름다웠거든요. 내가 꼭 행복하길 바란다는 모순의 말도. 우리는 헤어진 게 아니라 아주 잠시 서로의 자리를 지키는 거라는 변명도. 모두 믿고 싶어서 믿은 거예요. 나는 아직도 크리스마스를 기다립니다. 눈이 내리는 설원의 보드라운 탄신일을.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사랑 가득한 성탄절이라는 키워드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나는 나를 잡고 또 다잡고. 휘청거리지 않으려 하고.
오직 나를 휘두를 수 있는 건 당신이라서. 어떤 일에도 설레지 않기로 먹은 마음을 하나 둘 단추로 채워봤어요. 나는 이토록 견고해요.
기다리면 오겠죠. 이렇게 다짐한 시간은 자꾸 흘러가고, 이렇게 살아있는 나는 점점 희미해져요. 그래도 당신은 약속을 꼭 지키는 사람이니까. 이 날만큼은 실낱같은 기대로 미소 짓는 마음이어도 괜찮을까요. 잊는다는 건, 너무 오래된 신발을 사랑하는 일. 신을 수 없는 감정까지 감싸 안는 일. 그러다 꿈속의 꿈속에서도 바래지는 일. 아무리 걸어도 자꾸만 멀어지는,
나는 그게 싫어요. 도무지 잘 모르겠고요.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데요.
입가 주름에 맺힌 말들을 언젠가 마주 보고 전할 수 있겠죠. 서글픈 인사도, 희끗한 얼굴들까지도. 전부 돌이킬 순간이 분명 우리를 찾아오겠죠. 잘 지냈냐며 서로의 심장을 지분거리는 밤에도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다 녹아버려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정말이지 모조리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나는 지금도 해요. 나는 기다려요. 지금처럼, 그때처럼. 돌아오지 않았을 뿐이지, 당신은 반드시 살아있을 거니까. 이렇게 곁에 없어도 없지 않은 것처럼 말예요.
오늘도 멀리서 안부를 전해요. 몇 번째인지 세는 짓은 이제 하지 않을 거예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요. 눈이 와요. 멈추지 않고 계속 와요. 멈추지 않을 내 마음 같기도 해요. 하얗고, 또 하얗고. 당신이 없는데도 아름다워서 조금 슬퍼요. 오래 미안해요. 같은 장면을 우리가 보고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아쉬운 대로 나는 여기서, 당신은 그 어디선가 꼭 같은 하늘을 보는 걸로 해요. 어떤 순간에도 잊지 않기로 해요.
부디 아프지 않은 곳에서 예쁜 숨을 내쉬고 있기를.
“해피 크리스마스”, 여전히 사랑하는 당신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