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날이 밝는 게 점점 달갑지 않았다. 분명 해가 바뀌었는데, 내 눈앞에 번쩍이는 그것은 오래 깊숙이 묵은 채 지친 형상 그대로였다. 유년을 기록할 보모의 미소를 머금은 조각상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을 사람이라 칭해도 되는지 고민했다. 여럿 쌈짓돈 모아 몰래 시킨 마른안주를 뒤로 숨기듯. 가련한 고민을 야금야금 집어삼키다가 외로움에도 자격이 생겼다는 소식을 접한 뒤였다. 나를 바라보는 어제들이 흘린 감정 중에, 오늘 그에게 보여준 일기는 쉬어터진 김치만큼 애처로운 눈빛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왕왕 울었다. 용을 어디서 볼 수 있는지 물었으나, 돌아온 대답은 마트 전단에 찍힌 칠천구백 원짜리 용가리 치킨이 다였다. 엊그제 꾸었던 꿈이 무엇이었는지 아무리 떠올려 봐도 떠오르지 않아서 억지로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아무 꿈도 꾸지 않았다. 어쩌면 기억하지 못하면서 잠을 잤다고 몸이 우기는 중인지도 몰랐다. 아픔을 증명할 길이 없었다. 다른 누구보다 내 아픔이 크다고 목소리를 높일 욕심도 없었다. 이번에 뜨는 해는 다른 때의 것보다 크고 밝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아서 아쉬운 심정에 토를 다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새로 시작하고 싶었다. 일어나고 싶었고, 겨울잠을 끝내고 싶었다. 겨울잠이라는 진부한 어휘에서 드러나는 슬픔을 삭제하고 싶었다. 없던 것이 되어 나를 모른 체하길 바랐다. 스멀스멀 자라나는 희망이 꼴 보기 싫다가도 영영 나를 버릴까 봐 겁이 났다. 어쩔 수 없었다.
눈을 감으면 자꾸만 어긋나, 돌아가려 해.
일기 같았다. 죄책감을 품고 사는 소문의 정체는. 그것이 내 치부를 전부 알고 있다는 게. 붉은 열매를 갉아먹는 도중에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 나는 그게 제일 두려웠을 것이다. 이듬해, 우리가 서로에게 총을 겨누던 겨울밤.
너의 상심을 태운 휠체어가 둘만 아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침착하고 처연한 자태로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외계의 수식언을 붙여서. 네가 말한 용은 이곳에 없어. 알면서 물었다는 걸 알아. 그런데 너는 정말 알아서 안다고 말하는 게 맞을까. 의심은 의심이었다. 의심이 확신이 될 수는 없었다. 신뢰로 성장할 수도 없었다. 우리는 수십 분 마주 보다가 삼 초 정도 숨을 참았다. 하나도 괴롭지 않았다.
머리에 동그란 홀이 생겼다. 너는 그곳으로 용이 도망갈 거라고 말했고, 나는 처음부터 용 같은 건 없었다고 말했다. 애타게 찾던 이유도 이제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너를 만나기 위해 들쑤신 탄창일지도 모른다고. 좁고 뜨거운 구멍에 너와 손잡고 뛰어드는 상상을 했다. 파란색. 푸른빛. 이름도 시간도 달랐다. 다르고 틀린 얼굴 앞에서 우리는 삼 초 정도 눈을 감았다. 다시 눈꺼풀을 올렸을 땐 처음 보는 해가 거대한 장벽처럼 밤을 가로막고 있었다. 낭떠러지. 절벽. 진창. 조갈난 바위. 잡은 손을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은 네가 보았고, 노쇠한 눈동자 안에 담긴 나는 나에게 발각되었다. 당신과 우리는 시작과 끝에 서서 돌아오지 않을 인사를 나눴다. 겨누던 총이 철푸덕 추락하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우리는 앞만 보고 달렸다. 속절없는 약속 같은 건 하지 말자고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