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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연 May 30. 2024

이 신발이 네 신발이냐?

아닙니다, 제 건 없습니다.

      

나는 낡은 물건에 대해 무던하다.

무던하기보다는 그냥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다.

때로는 새것보다 오히려 낡은 물건이 친근해서, 더 편안하기도 하다.


그러나 편안해서 낡음에 무던하다는 것은 핑계일 뿐,

그냥 별로 관심이 없어서 낡음에 무던하다는 게 맞을 것이다.     


신발이 낡았다고 주위에서 수차례 얘기해 주면 그제야 신발을 한 번 쳐다본다.

그러나 결국 신발을 바꾸게 되는 건 신발 바닥에 물이 새서 불편하면, 그때 바꾸는 편이다.

물론 다른 신발이 없는 건 아니다.

그냥 무관심일 뿐이다.     


내 신발에도 관심이 없는데, 다른 식구 신발인들 오죽하겠는가.     

어느 날 아내가 자신의 신발이 매우 낡았다며 신발을 사야겠다고 했다.

그러시든가.     


마침 온라인 쇼핑몰에 괜찮아 보이는 신발이, 썩 마음에 드는 가격으로 올라와 있다며 두 켤레 정도 사야겠다고 한다.

그러시든가.     


가격이 괜찮으니 내 신발도 한 켤레 주문해 주신다고 한다.

그러시든가.     


며칠 후 택배 상자를 들고 들어온 아내가 ‘언박싱’을 한다.

그때 무언가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는 옅은 미소가 얼굴에 스치는 걸 본듯한데, 

내 착각이었을까?     


큰 박스 안에서는 신발 박스 3개가 쏟아져 나왔고,

아내는 하나하나 박스를 뜯어보았다.

그러고는 갑자기 호들갑스럽게 놀라는 소리를 낸다.


평소와 다른 과장된 행동처럼 느껴졌다면, 

이 또한 내 착각이었을까?     


박스 3개는 사이즈가 동일한 신발, 즉 모두 아내 것이었다.  

   

아내는 온라인 쇼핑몰 장바구니에 여러 개를 넣어 두었다가 작은 거 두 개, 큰 거 하나를 주문했는데, 

주문 과정에서 뭐가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작은 거 3개만 왔다며, 

왜 이렇게 된 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임을 강조하며, 나로서는 알아듣기 어려운 외계어를 남발한다.     


아내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난 이해했다.

모든 걸 깔끔하게 이해했다.

나는 IQ가 무려 세 자리다.

그래, 세 개 다 너 가져라.  

   

여보 난 괜찮소
난 지금 신고 있는 신발도 괜찮소.
겉보기엔 무척 낡아 보이지만 안쪽은 새것처럼 깨끗하다오.
아직 바닥에서 물이 새어 들어오지는 않는다오.
비록 뒤축이 해지긴 했지만 발이 삐져나오지도 않는데 뭐가 문제란 말이오.
난 정말 괜찮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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