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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꿈 May 30. 2020

나눔이란?

‘Sharing’을 넘어 ‘Common’으로

‘나눔’이란?


내가 근무하는 부서에서 정리해 놓은 나눔의 의미, 즉 ‘give(나눠줌)-> charity(자선) -> philanthropy(박애)’는 나눔의 가치와 외연 확장으로서 그 의미가 있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간 ‘sharing(공유)’이란 개념은 나눔을 관계성 중심으로 사고할 수 있는 영역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공유경제에 대한 재고가 가시화되면서 sharing 또한 근본적인 개인성과 위계적 층위를 탈피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그래서 최근 공유경제 영역도 심층적 의미를 분류하여 공유경제/커먼스경제로 그 구분을 구체화하고 있다.


나눔의 의미는 이후 ‘sharing’을 넘어 ‘common’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사적 공유를 넘어 사회적 커먼스를 구성해 갈 수 있을까? 공적소유에 대한 논의는 인간의 심리 추동을 고려하지 않은 일종의 낭만이거나 이미 실패한 사회주의적 이상에 불과한 것인가?


‘공유지의 비극’에 대한 이야기를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미국의 생태학자 가렛 하딘이 1968년 사이언스지에 기고한 짤막한 글을 떠올리면 공적소유는 이기심 혹은 나태로 인해 공멸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사회적경제 안에서는 그 해결책으로 (개인적) 호혜와 (국가적) 제도를 꼽는다. 황폐화를 막기 위해서는 이런 개인과 집단의 협력과 논의(혹은 감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해결 방식은 공유지의 사유화 전환이다. 그 땅을 개인 단위로 쪼개면 효과적으로 관리가 된다는 것이다. 이상의 논지를 들었을 때 문득 머릿 속에 떠올랐던 것은 미국의 서부개척시대의 풍경이다. 영화 <파 앤드 어웨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말 그대로 ‘깃발 먼저 꽂는 이’가 그 땅의 소유권을 얻었다. 이처럼 공공의 것은 ‘누구의 것도 아니’니 얼른 먼저 선점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유화의 확대가 과연 공유지를 ‘지키는 것’일까? 오히려 그 반대는 아닐까? 사유물이라는 울타리는 다른 대상이 쉬이 넘을 수가 없다. 그가 피해자일지라도, 특히 장기적이고 비가시적인 영역은 더더욱… 이러한 문제 안에서 공유지에 대한 관점은 ‘누구의 것도 아니니 내가 먼저 소유한다’에서 ‘누구의 소유도 아니기에 함께 지켜야 한다’로 점차 전환되어야 한다. 특히 지금과도 같은 기후위기의 시기에는 더욱 시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와 맞물려 나눔의 의미를 그물코적 인식을 통해 ‘모두의 것’인 전 지구적 차원으로 확장해보면 어떨까?


나눔이란 것이 결국 ‘관계성의 인식’이라면, 관계의 확장은 나와 관계하는 이들을 넘어 이 세계 전체가 된다. 이를 통해 세계시민이라는 개념과 연결고리가 생긴다. 결국 개인은 세계시민으로서 또 다른 세계시민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 차원 더 확장하면 개인은 이 세계 자체와 관계하게 된다. 하지만 인간이 아닌 물질화된 세계의 실체를 적용했을 때 나는 내가 앞서 말한 나눔의 층위적 차원에서 한 걸음 벗어나 있다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이미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는데 내가 그것과 어떻게 건강하게 관계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사적’이라는 표현은 다소 모호하다. 내가 땅이나 물건에 합당한 비용 지불했기에 그것은 완벽히 내 소유라고 할 수 있을까? 그 합당한 비용이란 누가 책정하는가? 플라스틱 통에 들어 있는 생수는 누구의 것인가? 물을 길어 올린 이의 것인가? 공장을 만든 기업의 것인가? 혹은 그 기업 투자자들의 것인가? 용기인 폴리에틸렌테레프탈레이트를 얻게 되는 석유와 그 부산물들은 과연 누구의 것인가? 질문은 계속 확대되어 간다.


나눔의 의미가 계속 확장되면 결국 세계를 넘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라는 영역과 마주하게 된다. 한나 아렌트는 그의 저서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 조건의 무대를 지구로 상정하고 있다. 지구는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가는 기본적인 조건이자 가장 핵심적인 공공제이다 이런 지구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비단 우리 인간만이 아니며, 당연하겠지만 그 수혜도 지구 안에 머물고 존재하고 향유하고 있는 모든 것들의 몫이다.


향후 우리는 UN이 제시한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다’는 사려 깊은 배려를 지구법학 차원에서 ‘지구 안의 그 어떠한 것’도 라는 의미로 해석해 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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