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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람 Aug 11. 2024

한 걸음, 한 걸음

본가에서 돌아오고 2주일간 밀린 약속과 업무들을 처리하느라 하루도 빠짐없이 서울을 나돌았다. 평일에는 서초, 강남, 노량진, 용산, 한남, 신촌, 당산, 목동까지 쭉 돌아 다니고 주말 동안에는 대전에서의 약속과 일산에 있는 교회까지 다녀오니 다가올 이번 주는 집에 짱박혀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6, 7월 동안에는 의사나 전공의가 아닌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그동안 잊고 있었던 세상에 대한 여러 관점을 다시금 회복하는 시간이었다. 8월에는 만남의 대상이 의사들 반, 타 직종 근무자들 반이었어서 어느 정도 균형 잡힌 시각으로 내 상태를 바라볼 수 있었다. 


만나게 된 의사들 역시 정말 다양한 상태의 의사들이었다. 대학병원에 근무하다가 8월이 되어서 나간 전공의, 예비 1년차, 2, 3년차, 나와 같이 4년차를 앞두고 있던 동기들, 이번 사태로 병원에서 나와 로컬에서 일하고 있는 전임의, 대학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전임의.. 등등.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모두 살아내고 있었지만, 불안하고 답답한 마음들이 느껴졌다. 남자 전공의들은 병역이 면제된 상태이거나 다녀온 사람들이 아니면 언제 군 입대를 할 지 몰라 불안해 하고 있었다. 또한 운이 좋아서 나와 같이 지인을 통해 또는 의국 선배들을 통해 직장을 구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한 상태였고, 이력서를 60개는 써야 한 두 병원에서 연락이 온다고 한다. 대부분 병원에서는 3, 4년차가 아닌 경우 본인 병원에 근무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아 저년차 선생님 일수록 일할 기회가 적었다.  


그 와중에 대학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교수님들은 전공의들의 생활고를 도와준답시고 전임의들을 시켜 전공의들에게 촉탁의 업무를 선심쓰듯 제안하고 있다. 또한 전임의들은 과한 업무에 논문 업무라도 일을 덜고자 몇 푼 안되는 돈을 전공의들에게 쥐여주며 추후 졸국을 빌미로 여러 데이터 정리를 시키고 있다고 한다. 전공의들이 없는 와중에 주니어 스텝이나 전임의들의 업무가 많아진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공의들이 병원을 나와도 몇몇의 희생으로 병원이 잘 돌아가고 있으니 그 안에서는 정신 차린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것이 느껴져서 좌절스러웠다. 


이 사태가 증원 철회라는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끝나기를 여전히 소망하지만 점점 아득히 멀어져 가는 허황된 꿈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뉴스를 보면 의대 증원 말고도 여러 가지 이슈가 빵빵 터지고 있는데, 그런 와중에도 자신의 잘못을 모르고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며 끄떡 없어 보이는 현 정부를 보면 더 그런 기분이 든다. 각자의 사정이 있기에 병원으로 돌아가는 전공의들을 탓하고 싶지는 않고, 그들을 비난하는 전공의들의 마음 또한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하지만 서로를 공격하면서 발생하는 의사들 간의 싸움을 볼 때는 공격 받아야 할 적군은 저 멀리 있는데, 불필요한 싸움을 하는 것 같아 속상하다. 


그 와중에도 자신이 일하게 될 본업은 잊지 않으며 이 시간을 기회로 삼아 열심히 공부하는 선생님들도 볼 수 있었다. 그런 모습이 자극이 되어서 '나는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면 좋을까?', '졸국을 한다고 해도 내가 원하는 미래를 살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하지?' 라는 고민을 시작하게 되었다. 대학병원에 돌아가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특유의 수직적인 분위기를 내가 잘 적응해 가며 근무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고, 미용병원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여자 성형외과 의사에게 많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그 시장에서도 잘 적응하고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요즘은 아예 다른 나라에서 성형외과 의사로 근무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서 떠나볼 지 고민하는 중이다.  


그러려면 영어 실력뿐만 아니라 논문과 같은 학업같은 성취 또한 이뤄야 해서 준비할 것들이 산더미라는 것을 알지만, 옆에서 정말 그것들을 실행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동기 부여가 되고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 걸음, 한 걸음 꾸준히 무언가를 해나가면 그것이 내가 원하던 모습의 결과가 아닐지라도 어떤 성과에 다다른다는 것을 인생에서 여러차례 목격해왔다. 지금 이 시간도 꿈꾸던 전공의의 모습은 아니지만 멈추지 않고 딛고 있는 나의 걸음걸음이 언젠가는 내가 원하는 인생의 모습으로 인도해 줄 것이라는 것을 안다. 모두들 불안하고 답답한 상황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기를, 잘 이겨내기를 바라며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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