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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람 Jul 17. 2024

독(毒)을 차고

퇴사 PAD +2 

"안녕하십니까 00000의료원 수련교육부입니다. 

2024년도 하반기 및 상급년차 정원 확정을 위해 복귀/사직 여부를 확인한 결과 선생님께서는 응답이 없거나 미복귀한 경우에 해당되어 2024.07.15일자로 사직 처리(1년차는 2024.03.01. 일자 임용등록 취소)가 진행됨을 알려드립니다."


의료원에서 날아온 문자를 보자 마자 '허무한듸!' 라는 말이 저절로 터져나왔다.

중학교 2학년 때 부터 꿈꿔왔던 성형외과 의사가 되기 위해, 공부한 수험생, 의대생 시절도 물론 힘든 시간 이었지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혀 있는 것과 다름 없게 느껴졌던 3년간의 전공의 생활을 뒤로 하고 퇴직금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로 병원을 나가게 되는 것이 허무하고 개탄스러웠다. 


오전에는 1교수님과 통화하였고, '가을턴을 뽑게되면 너의 자리를 보장해 줄수가 없고, 다른 사람이 지원할 위험이 있으니, 오늘자로 복귀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오후에는 2교수님과 통화하였고, '현재 상황이 아직 아무것도 변한게 없으니 아직 돌아오라고 설득하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너나 다른 전공의들의 미래가 걱정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모두가 처음 겪는 초유의 사태에 병원 일만으로도 정신 없으실 텐데, 두 분 모두 전공의들을 진심으로 염려하는 마음이 느껴져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원채, 나는 꼼꼼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인데, 아주 사소한 것들부터 모든 것들을 챙겨야하는 성형외과의 일들이 적성에 맞지는 않았다. 덕분에 일할 때 여러 실수를 범해 교수님들에게 많은 꾸중을 듣고는 했다. 그 시간을 지나, 어려운 때에 위로해 주시고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매달 zoom 으로 하는 독서 모임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첫 시작을 '피터 비에리' 의 '자기결정' 이라는 책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리스본행 야간열차'라는 책의 작가로도 유명한 사람인데, 생전 '작가' 뿐만 아니라 '언어 철학자'로도 많은 명성을 떨친 사람이었다. '자기결정'을 너무 인상 깊게 읽어서 '삶과 존엄 3부작' 으로 알려진 '삶의 격', '자기결정', '자유의 기술'을 모두 읽었다. '자기결정'은 자기를 이해하는 자기인식의 과정이 꼭 삶에서 필요하며, 이를 통해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는 과정까지 나아갈 수 있음을 역설하는 책이다. '자유의 기술'은 내용이 사실 어려워서 내가 이를 처음부터 끝까지 잘 읽은 것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어디까지가 자신의 '자유'인지를 정의하고 이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 기술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최근까지 읽은 '삶의 격'은 우리가 결국 삶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 것에 있어 존엄성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다시 인식할 수 있게 해준 책이었다. 


전공의 근무 기간 동안 누군가에게 계속해서 통제받고 검토 받는 삶을 살아왔고 존엄성에 대해서는 1초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일에 치여 정신 없는 중에 일적으로 나를 괴롭히는 시니어를 원망한 적도 있지만, 결국 그들도 같은 시스템 속에 있는 사람들이 었고 그들이 그동안 받았던 시스템적인 통제를 동일하게 나에게 가한 것이기에 마음 놓고 미워할 수가 없었다. '수술과가 원래 그래', '도제식 교육이라서 어쩔 수 없어.' 등의 이유로 나의 고난을 해석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않는 의문점들은 여전히 많았다. 왜 이 가혹한 노동의 시간은 80시간이 훨씬 넘은 시간을 보내도 끝나지지가 않는지, 병원 밖에서도 나는 왜 병원 일에 붙들려 있고 벗어 날 수가 없는지. 


전공의로서 사는 삶이 존엄성을 유지하기 힘든 삶이고, 내가 병원의 부품과 같은 존재라는 건 일할 때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병원에서 사직 처리하는 순간 까지 내가 사직을 요청한 날짜로 인정해 주지 않는 것을 보니 좌절스러운 감정이 느껴졌다. 내가 느낀 좌절감과 마찬가지로 전공의들이 의대 증원 2000명에 분개한 이유는, 증원을 비롯한 필수의료 패키지로 시작될 이 직업에 대한 통제가 이 직업군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마구잡이로 탁상행정만하는 정부나 공무원들에게 들쑤셔져,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존중이 없이 이뤄진 것 때문이 아닐까. 


일단 일은 벌어졌고, 나는 이제 전공의도 아니고 백수가 되었다. 앞으로 내 자유를 잘 사용해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내 마음의 소리를 따라 결정하여 올바른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 허무하지만, 마음의 독을 품고 선선히 걸어가 마치는 날 깨끗한 마음을 건질 수 있길. 지금 동일한 좌절감과 불안감에 시달릴 같은 사직 전공의 선생님들이 이 시간을 잘 헤쳐나가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내 가슴에 독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고 위협하고

독 안 차고 살아도 머지 않아 너 나 마주 가버리면
억만세대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한듸!' 독은 차서 무얼 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 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듸!'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날 내 외로운 혼 건지기 위하여


김영랑 - '독()을 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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