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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람 Aug 02. 2024

다시, 첫 출근

퇴사 + PAD 2w 4d

근무 중단 기간까지 합하면 2월 말부터 도합 5개월을 펑펑 쉬었는데, 내 인생에 통틀어 이렇게 오랜기간 쉰 적이 없었다. 다시 병원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막연한 생각 및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부모님이 걱정하실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쉬는 시간 동안 꾸준하게 요가도 하고 유투브를 보면서 운동도 했다. 중간에 F45도 잠깐 다녔는데, 만 30살이 넘어가니 무릎이 시려서 이제 힘든 운동을 오래 하지는 못하게 되었다. 지금은 통증 때문에 오른 무릎에는 무릎 보호대를 꼭 착용하고 산책해야 하는 신세다. 


무릎의 만성통증을 얻게 된 것은 아쉽지만, 5개월이라는 무기력하게 보낼 수도 있었던 시간들을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생산적으로 보낼 수 있었다. 지금은 독서 모임, 신앙 모임도 하고 있고, 주일에 갈만한 교회도 찾았고, 병원 소송도 꾸준하게 준비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감사하고 또 뿌듯한 일은 다시 일자리를 찾게된 것이다. 일자리라고 해도 성형외과 전공을 살릴 수는 없고 적은 보수의 일이지만, 갑자기 집을 갖게 되어서 이자를 꾸준히 내야 하게 되었는데 너무 좋은 시기에 좋은 분께 일자리를 인계 받았다. 그분의 도움 덕분에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고 일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천성적으로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걸 또 좋아하게 되다 보니, 관심사가 너무 많고 잡다하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갖고 다가가는 편인데, 타인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를 못해서, 이유 없이 처음 본 사람이 나에게 악한 감정을 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힘들어 한 적이 있었다. 이런 단점도 있는 성격이지만, 대다수에게는 호감을 주는 성향이라 이유 없이 많은 애정을 받게 된 경우도 많았다. 어렸을 때는 방법을 몰라서 애정 어린 여러 도움을 준 귀인들에게 제대로 보답을 해주지 못했다. 그 분들께 제대로 보답을 드리지 못한 채로 인연을 꾸준히 이어가지 못해 아쉬운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대학교에 올라와서도 조건 없이 많은 것들을 주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때마다 나도 저런 Giver 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인턴 때는 처음 돈을 벌기 시작한 덕분에 주머니 사정 뿐만 아니라, 성령이 충만한 상태로 근무를 해서, 간호사 선생님, 환자들, 같이 근무하는 인턴, 전공의 선생님들께 너나 할 것 없이 이것저것 나눠 주고 또 나눠 받고 하던 일들이 여러차례 있었다. 성형외과 전공의로 병원 일을 시작하고 나서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하루하루 먹고 자는 것에만 급급했고, 충만했던 마음이 금방 바닥을 드러내 버렸다. 병원에서 나와서 다시 숨을 고르고 주변을 돌아 보니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결국 내가 여기 서있을 수가 없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태어날 때 부터 누군가에게 빚을 지고 나온다. 엄마가 10달 동안 나를 품고 있었을 때,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힘들게 했는지, 곧 출산을 앞둔 임신한 친구를 보며 많이 느낀다. 그 때, 엄마 안에서 쑥쑥 자라게 된 것도 결국 그녀의 영양분을 빨아먹지 않는 한 불가능한 것이었다. 전공의 1년차 때, 매일 우는 나를 달래러 6시간이나 걸리는 거리를 달려와 3개월 내내 점심, 저녁 도시락을 병원에 들고와 주었던 아버지 덕분에 어이없는 이유로 그만두기는 했지만 3년이라는 전공의 생활을 버틸 수 있었다. 부모님 뿐만 아니라 나도 모르게 나는 남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으며 늘 빚을 지고 있는 신세라는 생각이 든다. 


최근엔, 채권자로서 채무자들에게 직접 그 빚을 갚지는 못했지만 내가 또 다른 채무자가 될 수 있었던 일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 빚을 내가 돌려 받기 보다는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빛을 탕감해주는 채무자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 마음을 이해하고 행하지는 않지만, 내가 준 도움이 또 다른 도움이 되어 누군가에게 향하는 모습은 채권자에게 보답을 받는 것 보다 더 뿌듯하다. 


사직 처리 된 전공의들이 쏟아지면서, 일을 하지 못해 힘들어하는 전공의들이 있다. 아무래도 경제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본인의 무기력함과 쓸모를 증명하지 못하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서울시의 각 구 의사회나 여러 지역의 의사회에서 퇴사한 전공의들을 도와주려고 하고 있지만, 모금은 냈던 사람들만 더 내고 있고, 1,2차 병원들도 근근히 먹고 사는 상태라 고용을 통해서 전공의들을 도와주기는 매우 어려운 상태라고 한다. 사직한 전공의들은 증원을 철회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쉬는 시간 동안, 의료 정책들에 대해 공부를 하니, 의대 증원이라는 방향이 정상적인 의료 개혁과 얼마나 동떨어진 해결책인지 알게되었다. 그리고 현 사태가 이전부터 오랜 시간부터 진행된 건강보험의 곪을 때로 곪아있던 정책적인 문제들이 지금 터지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가 되어야 이 문제들이 해결이 되어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지 알 수는 없다. 그저 나는 여기 나한테 주어진 것에 대해 감사해하며 같이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조금 더 돕고자 하며 살아갈 뿐이다. 그렇게 하루하루 걷다 보면 어쩌면 원하던 곳에 다다르게 되지 않을까. 지금 목표는 내가 깨달은 것들을 잊지 않고 일할 때도 꼭 붙잡고 가져가는 것이다. 힘들고 지친 상황에서도 내가 받았던 것들과 소중한 생각들을 잊지 않고 지켜 나갔으면 좋겠다. 오늘도 다들 무탈하고 아프지 않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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