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무 중단 D+17
전일 정부에서 근무 중단한 전공의들에게 월급을 주지 말라고 명령이 떨어졌다. 사직서를 수리해주면 요양병원에서 아르바이트라도 할 텐데 당장 다음달 월세 부터 걱정이다. 적금, 연금, 보험 등 매달 빠지는 돈도 많아서 당장 수입을 구해야 한다. 그동안 했던 알바를 돌이켜 봤을 때 수입과는 별개로 누군가를 가르칠 때 제일 자기효능감이 높았어서 과외나 가르치는 일을 시작할까 고민이다.
근무 중단 후, 부모님이 집에는 언제 내려올 거냐고 계속 물어보셔서, 이번주는 본인 일로 서울에 올라온 동생과 함께 주말에 KTX 를 타고 본가인 울산에 내려갔다. 5일 동안, 치매증상이 심해진 할머니를 뵈러 요양병원에 면회를 가거나 충치로 인해 통증이 심해져 치과를 방문해 치료받은 일을 제외하고는 거의 폐인처럼 누워 지냈다. 서울역에서 먹은 쌀국수가 탈이 나서 내려온 첫날 부터 발생한 장염 증상 때문에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느라 탈수 증상이 생긴 탓도 있다. 백수 생활을 보내며 느낀 것은 내가 생각보다 성형외과 의사라는 직업에 미련이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성형외과 전공의가 되고 싶었던 것은 '갓핸드 테루(야마모토 카즈키)'라는 만화에 나온 성형외과에 대한 설명 때문이었다. 그 만화에서는 천재적인 수술을 하는 의사에게 '갓핸드'라는 수식어를 붙였는데 그 중 성형외과 의사가 갓핸드 중 한명이었다. 그 전까지 성형외과는 '미용 성형'만 하는 줄 알았던 나에게는 '재건 성형'이 신선한 정보였다. 특히, 환자의 피부 재생을 위해 '거머리'를 쓴다는 대목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전공의가 되어 직접 환자 한테 거머리를 올려놓게 되었을 때 진짜 즐거웠다. 피를 빨아먹으며 점점 부풀어오르는 거머리를 귀여워하는 나를 보는 중환자실 간호사 선생님의 질색하던 표정이 생각난다. 당시의 나는 1년차 선생님의 휴가로 주치의 일을 대신해 주던 2년차 전공의 였는데, 1년차 일을 하느라 바빠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오랫동안 거머리를 관찰하지 못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거머리를 환자한테 쓴다는 것은 그 수술하는 부위가 거의 죽어간다는 뜻이고, 안타깝게도 수술 후 경과는 좋지 않았다.
중학교 시절, '헬로우 블랙잭(사토 슈호)' 나 '바티스타 수술팀의 영광(가이도 타케루)' 와 같은 의료 환경의 현실에 대해 알려주고자 하는 만화나 책도 정말 좋아했지만, 판타지 같은 요소가 섞인 '의룡(나가이 아키라, 노기자카 타로)' 같은 만화도 매우 즐겨 봤다. 내가 의사가 된 이유의 8할이 저 만화들 때문이다. 실제로는 저런 매체에 나오는 의사들처럼 프로페셔널하게 환자들을 돌보지는 못했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3년을 보냈다는 것에 후회는 없다.
단지 '거머리' 뿐만 아니라, 성형외과는 꽤나 매력적인 과이다. 특히 사고나 암으로 인해 수술을 받아야 하는 경우 이를 다시 원해 형태로 복구 시켜 주는 '재건 성형' 은 내 마음을 홀연히 빼앗아 갔다. 특히 유방암 환자에서 외과에서 수술하여 제거한 부위를 implant나 자가 조직 (등 이나 배)를 사용하여 빈 공간을 메꾸어 건강한 부분과 비슷하게 그 모양을 만들어 낼 때의 쾌감은 이루어 말할 수 없다. 당뇨발로 발의 형태를 유지할 수 없는 환자나 사고로 손의 형태가 어그러진 환자에게 여러 수술적 방법으로 원래의 모양으로 그 형태를 만들어 준 후, 환자들이 만족스러워 할 때 의사는 제일 뿌듯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그만큼 어렵고 오랜 시간이 필요하며 실패할 확률도 매우 높은 수술이다. 이런 수술이 미국은 5천만원에서 8천만원 가까이 되는 돈이 들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비용이 1천만원도 되지 않고, 당뇨발 재건을 위한 유리 피판 수술 (free flap reconstruction) 의 경우는 12시간 넘게 수술하고 받는 돈이 2백만원 이다.
필수의료 패키지에 대한 설명을 보면 의료를 '필수 의료' 와 '비필수 의료' 를 나누고 있다. 2주전 차관과의 대화 때도 '소아과'는 꼭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 과이고, '이비인후과' 의사는 굳이 있어야 할 필요가 없고, 이 사람들이 돈을 더 많이 벌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말해서 일반인들은 이렇게 의료에 대한 정의를 곡해 할 수도 있다는 염려와 함께 이를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이비인후과 내에서도 암이나 난청으로 인한 수술 등 필수적으로 환자들에게 시행하여야 하는 수술 항목들이 있다. 특히, 선천성 기형으로 태어난 소아들을 위해 시행하는 후두 및 기도 질환에 대한 수술이나 인공와우 수술은 그 필수성이 매우 높다. 영상의학과도 사람들이 대부분 앉아서 컴퓨터로만 일한다고 생각하지만, 소아에게 발생한 장중첩증(intussusception)을 정복(reduction) 하거나 멈추지 않는 객혈이 발생하여 거의 죽어가는 환자가 있을 때, 색전술(embolization)을 시행하여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게 하는 꼭 필요한 과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환자들의 요구대로 그들이 원하는 미(美)를 충족시켜 주는 '미용 성형'도 결국 개인에게 충분한 만족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매우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노화로 인해 눈꺼풀 쳐짐이 발생하여 이로 인해 시야가 가려지거나 눈을 더 잘 뜨기 위해 이마에 힘을 주어 이마 주름이 더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교정해주는 쌍꺼풀 수술을 대학병원에서도 많이 시행한다. 수술 후 외래로 온 환자들이 눈 뜨기가 훨씬 편해졌다며 만족감을 드러낼 때, 집도하지는 않았지만, 같이 수술에 참여한 전공의로서 매우 보람을 느낀다.
3년간 후회 없이 열심히 일해서, 이 직업을 작금의 사태로 인해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된다고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그 분들께 이런 만족감을 드릴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 아쉽기는 하다. 정부에서 '필수과', '비필수과'를 나누고 '급여', '비급여' 항목을 나누는 기준이 의료 현장에 있는 사람이 보기에는 정확하지 않다. 이런 비정상적인 시선 속에서, 비필수과에 대한 탄압은 의료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점차 심해지겠다는 생각이 든다.
'거머리' 덕분에 대학병원에 남아 재건성형을 하고 싶다는 꿈을 꾸던 중학교 2학년 짜리 아이는 이렇게 성형외과 의사라는 꿈을 점차 접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