돕는 다는 것은 함께 비를 맞는 것
어릴 적부터 나는 혼자 있으면 외로움을 잘 타고는 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상대방에게 먼저 다가가고자 했지만, 배려가 적고 내가 표현하고 싶은대로 표현하며 다가갔기 때문에 타인에게 나는 부담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러다 보니 유치원, 초등학교 때는 온전히 마음을 나누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이후, 중학교 때 비슷한 성향의 친구들을 만나고, 고등학교부터는 여러 지역을 떠도는 삶을 살다보니 적응을 위해 사회성이 점차 형성되어 지금의 외향적이면서도 사교적인 내가 될 수 있었다.
점차 사교적인 성향이 되어 갔다고 하더라도 피할 수 없이 고독해지는 기분을 느꼈던 것은 수련회와 같은 공간이었다. 엄격한 분위기 속에 오와 열을 맞춰 조교의 지령하에 행동하다가도, 다들 쉬는 시간이 되면 옆자리 친구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소란스러워 지는데, 나는 항상 방 귀퉁이에서 멍하니 천장이나 벽만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의 내가 웃겨보였는지, 사진을 찍어서 친구가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사진 속의 내가 너무 외로워보여 안쓰러운 기분이 들었다. 나이가 들어서 대학교 새내기 때 참석한 엠티에서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그 뒤로 한참 동안 수련회와 같은 곳을 갈 기회는 없었다가 저번주 주말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교회 수련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사실 근무 중단 이후, 신앙적으로도 많이 방황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 개인적으로 예배드릴 수 있는 교회를 찾는 것이 나에겐 매우 중요한 쟁점이었다. 한달 전, 3년 만에 교회 방랑 생활을 끝내고 정착할 교회를 찾았다. 집에서의 거리가 1시간 10분이나 걸리지만 목사님 설교 뿐만 아니라 같이 교회에 다니는 지체들과의 대화가 너무 좋고 충만해지는 기분이 들어, 일요일마다 늘 설레는 마음으로 교회를 향하고 있다. 교회 온 지 한달 만에 수련회까지는 참석할 줄은 몰랐는데, 내가 속한 목장이 30대 청년들만 모여있는 목장이라 다른 연령대의 친구들과도 대화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참석하고 싶었다. 야간 당직 근무 때문에 3일 중 2일만 참석 가능한 스케줄이었고 집에서 1시간 반이 걸리는 장소였지만, 수련회 장소 근방에 사는 친구를 잠시 만나고 더위를 뚫고 수련회장으로 향했다.
수련회 장소는 북한산 아래였고, 여러 교회들이 수련회를 와 있었지만 나무와 풀이 우거진 곳에 위치해서 그런지 고즈넉한 기분이 드는 곳이었다. 처음보는 사람들과, 2-3번이라는 적은 만남 횟수를 가졌던 사람들과 같은 조가 되어 내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누군가 어떤 질문에는 대답을 거절하기도 했으며, 어떤 대답은 말을 하면서도 너무 솔직하게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는지 조심스러워졌다. 약간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 그 다음 찬양과 설교 시간이 되었다. 내가 알던 보통의 교회 수련회와는 다르게 감정적으로 크게 격양된 분위기는 아니었고, 넓지 않은 방에서 30명 남짓한 사람들이 진솔한 찬양을 부르며 몇몇 사람들의 조용히 울먹이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설교 말씀의 주제는 오순절 성령의 재림 (사도행전 2장)이 주제였지만 목사님은 항상 그렇듯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말씀을 나눠 주셨다. 교회 예배시간에는 잘 꺼내시지 않던 개인적인 이야기를 솔직하게 나눠주신 목사님의 미사여구 없는 설교가 큰소리를 내며 꾸짖는 듯한 다른 목사들의 설교보다 오히려 마음 깊숙이 박히는 기분이 들었다.
예배 시간 이후에는 야식 시간 이었고, 분명 점심 때 친구 집에서 배가 터지도록 밥을 먹고 왔는데도 불구하고 1인 가구에게는 시켜먹기 힘든 치킨과 과일들을 준비해 주셔서 정신 없이 먹어치웠다. 걸신 들린 듯 먹는 것에만 집중하다 배가 부르니 옆에 있던 친구가 눈에 들어왔다. 나보다 10살이 어리다고 했고 까무잡잡한 피부에 조금은 나른한 표정의 마른 친구였다. 그 친구도 나처럼 조금은 이 자리가 어색해 보였다. 설교 전 시간에 내가 전공의이며 쉬고 있다는 이야기는 이미 한 상태 였고 (지금 생각해보니 더 부끄럽지만 더불어 그때가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는 것도 열변을 토하며 이야기했다.), 그 친구는 수줍게 웃으며 의사가 된 것이 대단한 것 같다고 하며 멋있으시다고 이야기 해주었다. 쑥스러운 기분에 멋쩍게 웃으며, 멋있는건 아니고 삼수해서 어렵게 된거라고 대답했다.
대화 속에 중간 중간의 침묵 또한 여전히 감돌았지만, 조금 더 이야기해 보니 서울신대 학생인 것을 알게 되었다. 올 초, 서울신학대학교의 교수님이 진화론을 옹호한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은 사건이 있었고, 21세기인 현대 사회에 창조과학을 옹호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해임을 요구하는 구시대적인 기독교 재단의 결정이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아 나는 당시 그 기사를 접하며 직업을 때려치는 것 뿐만 아니라 신앙까지 포기해야 하는 것인지 심히 고민이 되었다. 그 친구는 교수님의 수업을 들었던 학생이었고 인성적으로도 정말 훌륭한 교수님이었다고 했다. 본인을 포함한 여러 재학생이 교수님에 대한 징계를 반대하여 서명 운동을 하였고 아직까지 단식 기도를 하며 이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대학원생들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여러 의견 표명에도 끄떡없는 학교로 인해 무력한 기분이 든다고 하였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정부로 인해 법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탄압 받으며 의대 증원 반대의 목소리를 내도 힘없이 무시당했던 전공의들의 상황이 오버랩되었다. 어느 곳이든 기득권은 있고, 이들의 직권 남용으로 인해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타격 받는 피해자들이 있다. 비슷한 기분을 공유하는 다른 사람이 또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야식 시간이 끝나고 나는 같은 목장인 다른 자매님의 강의를 들었고, 그 친구도 같은 목장의 다른 친구와 대화를 하러 떠났다. 나중에 다시 글로 정리할 생각이지만, 자매님이 해주신 강의 또한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이는 내가 병원 생활에서 겪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될 것 같은 내용이었다.
강의를 해준 자매님은 집으로 돌아가셨고 나는 아는 사람 없는 방으로 돌아왔다. 대부분 아직 놀고 있는지 방은 조용했고, 나를 포함해 3명 정도만 있었다. 방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보니 모두 외로운 것 같았다. 외롭지만, 함께 외로운 사람들이 같이 있으니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승섭 고대 보건학과 교수님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 이라는 책을 참 좋아하는데, 이 책속에 신영복 전 성공회대 경제학 교수님의 '담론' 이라는 수필에 적힌 아래와 같은 글귀를 인용한 구절이 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억지로 말을 이어가지 않고 대화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같이 외로움으로서 외롭지 않은 기분 좋은 시간이었다. 야간 당직 근무 때는 침대 매트리스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몇 일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는데, 그 매트리스 보다도 얇고 열악한 매트리스 위에서 8시간 동안 한번도 깨지 않고 곤히 잠들 수 있었다. 다음날은 '소통'이라는 주제로 1:1 대화의 장을 가지는 시간이 있어 청년부의 많은 친구들과 대화할 수 있었고, 아직은 어색하지만 여러 친구들과 안면을 튼 상태로 수련회를 마무리 할 수 있었다.
기득권으로 피해받는 모두가 다 같은 처지는 아님을 알고, 더 힘들고 고통 받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분들께 모두 우산을 씌워드릴 수는 없지만, 같이 비를 맞고 서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주길. 우리가 주변을 돌아보고 같이 비를 맞는 누군가를 보며 희미한 웃음 지을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