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뉴스에서는 추석 연휴 동안 병원에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기사가 올라오고 있다. 병원에 있지는 않지만 병원 근처에 사는 사람으로써 느끼기에는 몇 달 전과 크게 응급실 운영이 달라진 것 같지 않은데 수면 밑으로 묻혀있던 것들이 이제 위로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댓글에는 아직도 의사들이 환자를 볼모로 하고 죽이고 있다는 의견들이 많고, 그런 기사들을 볼 때 마음이 편치는 않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증원이 진행된다면 더더욱 필수의료나 응급한 진료가 필요한 환자들은 진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의 의료 체제는 자본주의 사회 위로 쌓아 올려진 체제이다. 건강보험제도가 도입된 후 50년 동안 '의료의 사회화'를 진행하려고 노력 하였지만, 자본주의 사회라는 현실적인 요건을 고려 하지 않은 채로 세워진 정책들은 실정에 맞지 않거나 제도를 악용하여 다른 문제로 파생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나라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닌 한, 의료라는 노동 행위에 대한 대가에 대한 지불은 필요하며, 의사는 노동자이며 공공재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미국의 의료정책과 경제학을 공부하여 우리나라의 의료 제도와는 맞지 않는 정책을 남발하는 공무원들, 특히 보건복지부 공무원들의 정책들에 굉장히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의대 증원으로 발생 가능한 필수의료 인력에 대한 일부의 낙수효과에 대해서는 아예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제 때 치료 받지 못하고 고통 받을 텐데 이를 감수하고 방관하면서 까지 이 증원 반대를 유지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이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이 방향을 전환할 만큼의 설득력 있는 이유를 정부를 통해서 듣지 못해 의대 증원 반대의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나는 1달 전부터 집에서 차로 1시간, 지하철로는 1시간 30분 걸리는 거리의 교회를 다니고 있다. 대학교회를 떠난 후, 인턴 때부터 순환근무를 하는 병원을 오게 되면서 예배에 집중할 수 있는 교회를 찾지 못해 4년을 떠돌아 다녔다. 사실 단지 그 이유 뿐만은 아니었고, 모든 교회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예배 후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영상을 틀어주거나 이에 대해 문제를 삼을 때면 거북한 마음이 들어 정착할 교회를 찾지 못했다.
여러 신앙 유튜브를 보다가 내 마음에 울림을 주는 목사님들 중에서 그나마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교회가 지금 다니고 있는 교회였다. 특히 목사님이 일반 예배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청년부 예배의 목사님이라 예배 시간이 오후에 있어 더 편하게 갈 수 있었다. 더불어 이 교회를 가게된 다른 2가지 이유가 있는데, 어떤 교단 소속이 아니라는 점과 성소수자들 친화적인 예배라는 사실이다. 내가 대학교 때 다녔던 교회 또한 어느 교단에 소속된 교회가 아니었고, 예배 형태만 장로회 형식을 따라 시행되었던 곳이었다. 지금 다니는 교회 또한 교단 탈퇴 이전에 장로회 소속 이었기에 예배가 친숙하였다. 교단 소속이 아니게 된 것에는 성소수자 친화적인 예배라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결국 내가 이 교회에 다니게 된 두가지 이유는 같은 원인으로 비롯된 이유가 되겠다.
저번 주 설교 말씀은 동성애에 반대하는 이유로 가장 많이 언급하는 로마서 1장 26-27절 이 말씀 주제였다.
(롬 1:26)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롬 1:27)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개인적으로는 이 문장이 동성애를 성적인 사랑에만 국한하여 생각한 말씀이라고 생각하여 일부 폐해가 있다고 생각한다. 절친한 레즈비언 친구들을 보았을 때, 그 친구들이 나보다 성적으로 문란하거나 타락했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오히려 그런 점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친구도 있었고, 다만 그들이 가장 애정을 갖고 따뜻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동성일 뿐이었다.
예배 말씀 끝으로, 목사님은 가끔 성소수자들이 다니는 교회에서 설교를 하시기도 하는데, 저번주 설교 때 그 교회에서 '하나님은 너를 만드신 분' 라는 찬양을 모두 부르는 것을 보고 울컥하는 마음이 드셨다고 말씀하셨다. 너를 만든 하나님이 너를 가장 많이 알고 이해한다는 내용의 찬양인데, 그 모습 그대로 수용 받는 듯한 그들의 모습에 감동을 받으신 것 같았다. 수련회 때 목사님께서는 '돌아가신 후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어떤 질문을 하고 싶으세요?' 라는 친구의 물음에 '내가 설교한 내용이 다 맞는지, 이것이 진리였는지 묻고 싶다.' 라고 대답하셨다. 목사님의 말과 쓰신 책을 통해, 그분이 얼마나 하나님과 성경을 사랑하시는 지 오랜 시간 예배 말씀을 들은 것이 아님에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성경 한 구절 한 구절을 소중하게 여기는 분이, 무엇이 진리인지 탐구하는 과정은 여러 내적인 고통과 통찰하는 시간들을 수반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목사님의 성향을 알고 말씀을 들으니 그 노래가 목사님께 불러일으킨 감동보다 목사님이 성소수자들에 대해 느끼는 사랑이 가슴 깊이 다가와서 더 큰 울림이 되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동들이 옳고 그른지 지금 판단할 수 없다. 내가 지금 대학병원을 나온 것도 옳은 판단인 건지 하나님께 기도하고 답을 알려주시길 바라지만 하나님은 직접적인 음성으로는 알려주시지 않으신다. 다만 이것이 나의 이기적인 욕심을 위한 일만이 아니었길, 더 나은 의료를 위한 나의 선택이었길 바라며 행동한다. 창세기 1장 31절을 보면 하나님이 본인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시고 복을 주신 뒤 하신 말씀이 있다.
(창 1:31)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 째 날이니라
나의 삶이, 지금의 행동들이 다만 주님이 보시기에 좋으시길 바라며, 오늘 또 발걸음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