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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람 Sep 13. 2024

가만히 있으라

내 카톡 상태메세지는 '가만히 있으라' 이다. 내가 기독교인인 것을 아는 친구들은 그 메세지가 성경에서 나온 구절인지 자주 물어봤다. 기독교인이 아닌 친구들은 명령조로 인한 문장 때문에 성경에 나온 하나님 말씀이라고 유추한 것 같았고, 기독교인 친구들은 유명한 시편 구절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가만히 있으라는 뜻으로 해석한 것 같았다.  

[시 62:5] 내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기다려라. 내 희망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다.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내 성향을 생각한다면 성경 구절처럼 정말 가만히 있어야 할 때도 분명 존재하는 것 같다. 아쉽게도 나의 상태메세지는 성경 구절에서 따온 문장은 아니며,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고자 기억하고 싶어 2014년 부터 유지해 온 상태메세지이다. 


세월호 참사는 내가 삼반수를 끝내고 의대를 합격한 예과 1학년 때 일어난 사건이다. 전국적으로 모든 국민들이 슬픔에 빠진 일이기도 했으며, 자극적인 기사들과 여러 이슈들로 오랜 후유증을 앓았던 일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얼마 되지 않은 나이였고, 고등학교 1학년 때 목포항에서 바다를 타고 제주도 수학여행을 다녀왔던 경험이 있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었던 비극이라는 생각에 더 크게 와닿았던 것 같다. 사고부터 이어진 모든 과정들을 지켜보며 무엇보다도 두려웠던 것은 배의 침몰 후, 안내방송 뿐만 아니라 해경이나 국가의 안일한 조치들을 보면서 저런 큰 사고가 나도 이 나라는 나를 지켜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움직이지 말라는 안내방송을 그대로 듣고 행한 학생들과 선생님들 그리고 일반 승객들은 빠르게 배와 함께 가라앉았고, 선장과 선원들은 몇명을 제외하고는 탈출을 한 상황이었다. 


학생 때 책으로 접한 여러 역사적인 사건들은 이미 이 나라 자체나 고위층에 대한 신뢰를 잃게 만들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의 국가는 나를 지켜 주기 보다 내 목숨을 위협하는 대상이었고, 6.25 전쟁 시 북한의 남침 이후, 본인은 대전으로 대피한 후 서울 국민들에게는 서울을 사수하라는 방송을 한 이승만 전 대통령의 행위는 기만적으로 느껴졌으며, 임진왜란 때 백성들을 버리고 피난 간 선조의 모습에서도 이 나라는 나를 지켜주기 보다는 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는 곳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실시간으로 목격되고 밀접하게 와닿았던 것이 세월호 참사였다.  


정부는 현재 응급실 상황이나 예정될 추석 응급실 대란에 대해 브리핑으로 계속 해서 안심해도 된다고 이야기 하고 있지만 (출처 : "안심하셔도 된다”… ‘응급실 대란’ 우려 거듭 진화 나선 정부, https://www.segye.com/newsView/20240913511266) 의사로서 그리고 이 나라의 국민으로서 이 말에 대한 신뢰가 크게 생기지는 않는다. 친한 친구들한테는 추석 안부를 전하면서 꼭 다치지 말고 몸조심하라고 덧붙이는 말이 루틴이 되어버렸는데, 그걸 들은 친구는 저신뢰사회의 사회비용이 참 어마어마 한 것 같다고 대답했다. 이 사태는 결국 의사와 정부 그리고 국민이 서로를 더 믿지 못하는 사태로 이어질 것이고, 이는 증원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영원한 난제로 남게 될 것이다. 


어쩌면 전공의들끼리 조차도, 병원에서 같이 일했던 사람들도 믿지 못하는 이 사회에서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정말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런 현실 속에서 여기 글을 쓰고, 일을 하고, 같은 전공의들을 돕고자 애를 써도 무력감에 빠질 때가 있다. 가만히 있지 않으려고 하지만, 이미 침몰하여 잠긴 배에 들어있는 기분이다. 그럴때마다 더 좋은 사회를 만들어 나가고자 애쓰는 누군가와 이미 그 길을 걸었던 사람들의 흔적들을 보면서 정말 실낱같은 희망을 느끼곤 한다. 나 또한 그런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 이 자리에서 버티며 가만히 있으려고 한다. 먼저 도망치고 탈출하고 싶지만, 그런 무력감 속에서도 같이 견디는 사람이 되는 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것 같다. 


다들 추석 연휴 안전하고 따뜻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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