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주구장창 성경에 나올까? 구약의 십계명에도 ‘안식일을 지키라’는 구절이 있다. 신약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다는 이유로 핍박한다. 그만큼 유대인에게 안식일은 중요한 의미였다. ‘Sabbath’. 히브리어로 ‘안식’이라는 단어이다. 교수나 목사가 갖는 ‘안식년’은 영어로 ‘Sabbatical year’ 다. ‘멈추다’ 라는 뜻도 내포하는 이 단어는 당시에는 ‘파업’의 의미로도 쓰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는 날. 그것이 과연 안식일의 의미일까? 한때는 ‘안식일에는 속된 일을 하지 말고 나만 기억하고 기념해야 해.’ 라는 하나님의 속 좁은 마음이 만들어 낸 날이라고 생각했다. 그 참된 의미를 알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세계를 믿지 못하면 진정한 쉼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후였다.
다시 대학병원에 돌아온 지 2주가 되었다. 병원에서 '전공의 72시간 근무 시범사업'을 채택한 덕분에 근무강도는 전과 비할 바 없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은 살얼음판 위를 걷는 기분이다. 저년차가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바로 치프인 내 탓을 할까봐. 발표 준비에 소홀함을 보이면 교수님이 실망한 기색을 보일까봐. 초조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입원환자나 수술 수가 줄어들어도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나를 근무 중단 이전과 똑같은 상태로 밀어 넣었다. ‘전공의만 끝나면, 대학 병원만 탈출하면 벗어날 수 있겠지... 1년만 버티자.’ 라며 주문을 외웠다. 그러나 언뜻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전공의가 끝난다고 해서 이 불안감이 없어지는 걸까?’
학생 때는 부모님께 자랑스러운 딸이 위해 열심히 공부를 했고, 직장 생활에서는 시니어나 교수님들께 일 잘하는 전공의로 보이기 위해 손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일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누군가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은 어렵다.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하고 샅샅이 살펴보아도 상대방의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이거나 운이 따르지 않으면 실패한다.
1년 반이라는 우연한 휴식의 기회로 이런 사고방식을 재정의했다. 내 삶의 주체가 어디에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해결되지 않던 문제들이 우연히 값진 도움들로 해결되는 것을 보았다. 과연 이 삶이 내 손에 달려있는 것인가? 조금 더 큰 힘이 나를 받쳐 위로 밀어주는 기분이 들었다.
휴식이 끝나자 관성처럼 옛날의 나로 돌아가려는 모습이 안타깝다. 언젠가 내 뇌리에 박혔던 마태복음 11장 29절의 말씀이 떠올랐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자신의 멍에는 가벼울 것이니 이를 메고 살아가라는 말이 들렸다. 공교롭게도 이 앞 구절에서 예수는 ‘쉼’을 약속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안식일에도 병자를 고치던 분이 형식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쉬게 한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타인의 인정과 평가가 중요하던 삶에서 초점을 돌려 예수가 말하던 이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으로 맞췄다. 몸이 편해져도 초조하게 분주히 움직이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것을 보며 그 ‘쉼’이 무엇인지 알았다.
긴 충전의 시간을 주었던 안식년은 끝났다. 이제는 일주일에 한번씩 찾아오는 소중한 안식일이 남았다. 먹고 사는 궁리로 바빴던 일상을 잠시 멈추고 다른 이들의 응원과 선물로 버텼던 나날들을 돌아본다. 안식일의 의미는 이 시간 속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