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해외봉사 (2025-01-25 ~ 02-01)
갓 태어난 아기들에게도 자신의 자아가 있어 '배가 고프다.', '배가 아프다.' 등의 의사표현을 하기 위해 울고 소리지르고 떼를 쓰다가 시간이 지나면 점차 말을 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나는 언제부터 타인의 말을 듣기 시작했을까? 그리고 나는 언제부터 그 말들을 정확히 이해한 것일까? 사람들은 타인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 한다. 그 제목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때도 있었다. 한때는 '말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들려주고 싶은 욕심에 온 사람들이 경청하는 사람이 되길 원해서 이런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적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이 결국은 사랑의 표현임을 안다.
설 연휴 기간 동안 같이 근무했던 교수님의 제안으로 한 단체를 통해 캄보디아의 작은 마을에 해외봉사를 다녀왔다. 가기 전에 세 가지 걱정들이 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일단, 첫째로 수술 자체에 대한 부담감이었다. 교수님들이 해외 봉사에 참석할 경우 하루에 수술을 5-6건씩 했다고 말씀을 하셔서 아직 수술 경험이 거의 없는 전공의 시절만 3년간 보낸 나에게는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자리였다. 봉사를 떠나기 전 여러 수술 영상을 보고 공부를 하고 갔지만, 욕심내지 말고 환자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수술들만 하고 오자고 결정했다.
또 다른 걱정으로는 내가 봉사활동에 같이 동행하는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지에 대한 것도 있었다. 참가했던 단체는 인천, 서울 지방의 간호, 의과대학 학생 그리고 간호사, 의사들의 모임으로 이루어진 단체였는데, 단원들 중 해외 봉사 첫 참가자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이미 동아리 활동 등으로 서로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인데 그 가운데서 잘 어울릴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출국 전부터 수술을 위한 도구들을 빌리는 과정에서 개인적으로는 지원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었지만, 간호 학생선생님들, 간호사 선생님들, 그리고 같이 동행하는 외과 전문의 선생님의 노력으로 수술 품목들을 부족함 없이 준비하고 정리할 수 있었다. 출국 후에도 새로운 사람들 사이에서 나의 쑥스러운 마음을 알았는지 여러 선생님들이 먼저 다가오고 신경 써주었고 쉽게 그 단체에 녹아들 수 있었다.
세 번째로는 환자들과의 의사소통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알포인트'라는 공포영화를 보고 정말 무서워했던 기억이 있는데, 그 영화의 촬영지가 캄보디아라는 것을 알고 절대 가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했다. 그곳에 앙코르 와트라는 꽤 유명한 관광지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영화로 심어진 두려움을 감수하고 갈만큼 흥미롭지 않았다. 킬링 필드라는 안타까운 역사와 내전의 상처가 아직은 깊게 남아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기피했던 것 같다. 여행할 생각도 단 한번도 없었던 나라에 가서 봉사활동이라니..! 그곳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수술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치료할 수 있을지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캄보디아에서 우리의 봉사 장소는 성당이었는데, 신부님께서 프놈펜의 간호대학 선생님들을 몇 분 모시고 와서 통역사로 많은 역할들을 해주셨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하는 말들이 대부분 의학용어이고 이분들도 영어나 한국어를 조금씩만 할 수 있는 분들이어서 첫날 부터 소통에 꽤 어려운 일들을 겪었다. 그 와중에 첫날 처치실(수술실) 통역사 역할을 맡으신 분이 산부인과 수술 중에 셀카를 찍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핸드폰을 달라고 요청해서 사진을 지우고 휴지통에서도 그 사진을 지웠지만, 수술 중이던 선생님들이 단단히 화가 나셨고, 처치실 담당 통역사를 교체해 달라고 요청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러다 보니 처치실에서 통역을 맡는 사람이 고정적이지 않았고 계속해서 통역사가 바뀌며 새로운 통역사에 적응하는 과정을 거치다 보니 더욱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발생하였다. 진료 5일 중 마지막 이틀간 그나마 진료실에서 외과팀 통역을 맡아주시던 선생님이 고정적으로 처치실로 오게 되면서 꾸준히 통역을 해주셨다. 통역을 하는 과정에서도 내 말을 전달하는 것은 통역사의 핸드폰으로 번역 어플을 사용하여 어려움이 덜했지만, 캄보디아 사람들의 발음이 알아듣기가 어려워 환자가 하는 말을 통역해주는 통역사의 말을 듣고 이해하는 것이 어려웠다.
수술 전 진료 시, 환자의 고민이 무엇인지 어떤 문제가 있는지 듣는 것도 어려웠고, 수술 후에도 어떤 불편함이 있는지, 어떤 점이 궁금한지 알아내는 것도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처치실로 오는 환자의 수가 많지는 않아서 오랜 시간을 두고 이런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Pardon?'을 외치며 내가 이해하지 못했으니 다시 한번 이야기 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었다. 언어가 달라 진료가 오랜 시간 걸린다는 불편한 점도 있었지만, 오히려 환자들의 말을 경청할 수 있었던 점은 좋았다.
전공의로서 일하는 동안에는 환자들의 말에 귀 기울일 틈이 없었다. 1년차에는 새벽 5시부터 적어도 7시 까지는 10명이 넘는 환자들의 수술 부위를 소독하며 사진을 찍어야 해서 환자를 보는 것이 아니라 수술 부위만 들여다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회진 시간에는 교수님들에게 환자가 한마디라도 더 불평할까봐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입을 조용히 만드는 것에 더 집중했었다. 응급실로 오는 환자들은 놀라서 경황이 없는 환자들이거나 넘어져서 엉엉 울고 있는 아기들이거나 이미 술에 만땅 취한 사람들이었고, 그들을 마주하는 나는 하루에 3시간도 채 자지 못해 매일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의 의사였기 때문에 더더욱 환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고 들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캄보디아에서 오랜만에 들어간 수술방은 수도사제님의 집에 간이로 만든 수술방이긴 했지만 일반적인 수술방과 비슷하게 긴장감이 돌며서 활기찼고, 1년만에 실과 니들홀더를 잡고 봉합을 하니 감격스러워 눈물이 날 뻔했다. 매일 습관적으로 환자들의 상처나 수술 부위를 꼬맬 때는 느낄 수 없던 감정이었다. 내가 이 작업을 많이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 이것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한편으로는 이것이 결국 몸을 갈아 넣는 과정이기 때문에 나이가 들어서까지 오랜 기간 하지는 못할 수도 있겠다는 염려도 같이 생겨났다.
내가 앞으로 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일은 전공의 과정을 마치고 성형외과 전문의가 되어 상처를 치료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의도치 않게 주변 환경의 문제로 내가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일도 생겨나기도 하고 내 손이나 눈이 망가져서 수술을 하지 못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술이라는 것은 환자들의 고민과 걱정을 해결해 주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이를 해결한다면 가장 좋은 방안이 되겠지만, 그 전에 우선적으로 이 사람에게 어떤 것이 문제인지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만약 내가 성형외과 의사로 살지 못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다른 방식으로라도 타인에게 계속해서 귀를 기울이는 일을 하고자 한다. 그것이 내 이웃을 사랑하는 한 가지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이틀간 함께 했던 통역사 친구는 한국에서 온 선생님들이 정말 예쁘고 좋은 선생님들이라고 환자들이 말하곤 했다고 전달해 주었다. 그 친구가 적어 준 편지가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끝없이 멈춰 있는 것 같은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귀를 기울이면 누군가의 사랑이 들리고 그것이 또 나에 대한 믿음이 된다.
캄보디아 목도리인 크러마와 함께 전달 받은 편지. 조용하지만 침착하고 또 성실했던 통역사 친구 역시 좋은 간호사 선생님이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