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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를 보며

by 람람

지난 글 목록을 보니 오랜 기간 글을 쓰지 않은 흔적이 보인다. 그동안 책도 많이 읽고 몇 가지 생각들이 드문드문 머리에 떠오르기는 했지만 키보드에 선뜻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불안감'으로 인해 머릿속이 안개에 잠긴 기분이었다.


한달 전에 학회가 있었고 교수님이 촉탁의로 원래 전공의로 일하던 병원에서 일해 주지 않겠냐는 제의를 하셨다. 바로 거절했지만 며칠 뒤, 다른 교수님도 연락이 오셔서 현재 교수님들이 모든 업무를 하기에는 너무 바쁘니 도와줄 수 없겠냐고 물어보셨다. 교수님들이 수술, 연구만 하기에도 바쁜 대학 병원이니 기본적인 동의서나 처방 같은 일들을 하기에 과부하가 오신 것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아직 의대 증원이나 필수의료 패키지에 대한 정책들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대학 병원에 다시 돌아가 전공의는 아니더라도 일을 돕는 다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님들은 결국 믿을 만한 사람에게 일을 맡기고 싶어하시는 것 같아, 일을 아직 구하지 못한 예비 1년차 선생님께 대학 병원에서 촉탁의로 일할 의향이 있는지 물어보았는데, '다른 친구들 보기에 미안하고 부끄러워 어려울 것 같다.'라는 대답이 돌아와 일자리를 제안한 내가 너무 부끄러워졌다. 나도 받아들이기엔 옳지 않다고 생각한 자리인데 이를 다른 사직 전공의에게 동일하게 일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어본 것 자체가 잘못된 행동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일자리 제안 자체 때문에 '불안감'이 조성되었냐고 한다면 그것은 아니었다. 이를 제안할 때 '내년 3월 되면 돌아올거지? 1년 남기고 아예 전공의 그만둘건 아니잖아.' 라고 동일하게 묻던 교수님들의 말씀 때문이었다. 전문의가 되기 위해 남은 1년이 족쇄를 죄는 것 같은 느낌, 미끼를 물면 언제든지 어부들한테 잡아 먹히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학회 전, 후로 동기나 후배들을 많이 만나며 나눈 대화들도 불안감이 커진 원인이 되었다. 사직 이후, 보건학적인 강의를 통해 또는 정책을 공부한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이 의대 증원이라는 의료개혁 또한 실패로 끝날 것이 뻔하고 의사 뿐만 아니라 환자들을 위해서도 올바른 방향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그러나 모든 동료들이 같은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고, '내년에는 돌아가야지', '군대로 흔들면 어쩔 수 없지' 라는 의견들을 아예 묵인할 수는 없었다. 사직 전공의 각자의 미래가 있고 그동안 힘들었던 시간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정의를 타인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알 수 없는 불안과 무기력에 잠식 되어가던 중, 대학 동기였던 바이탈과 예비 1년차 예정이었던 사직 전공의 친구를 만났다.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 병원을 나와 느끼는 죄책감과 혼란스런 나의 상태를 이야기 하였더니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도 공보의 때 부터 환자 돌보는 것 정말 중요하게 생각했고, 한 사람 한 사람 성심성의 껏 돌보았어. 병원 나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 그래도 나중에 가까운 미래에 왜 알면서도 의사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냐고 이야기 하면 그때 할말은 있어야 할 것 아냐. 이렇게 병원에 나와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소통이 필요하다는 누나의 말도 이해해. 하지만 스테로이드도 사용하는 단계가 있잖아. 이전 단계들에 소통을 시도했지만 아무도 듣지 않아서 우리가 사직이라는 마지막 단계를 쓴거지. 그래도 변하는 것이 없는데 다시 낮은 단계의 스테로이드를 쓴다고 해서 달라 지는게 있을까?"


대답을 듣고 나의 죄책감이나 불안감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지만, 이 친구가 이전 부터 이 정책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해 왔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더 수긍이 되는 말이기도 하였다. 누군가가 보기에는 이기적인 선택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이 나의 불안을 조금은 가라 앉힐 수 있는 방법인 것 같다. 신앙에서도 마찬가지로 나의 믿음이 옳은 것인지 고민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믿음에 대한 의심이 불신과 동의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의 방향성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고민해야 한다. 그런 중에 생겨나는 불안감은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믿음이 아직 있다면, 내가 공부하며 걸어가는 방향에서 옳다고 생각하는 부분들이 존재한다면 이 불안감은 조금씩 희석 될 것 이다.


의심 없는 확신은 오히려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대통령이 방금 비상계엄령을 내렸다. 그는 이 계엄령이 종북 좌파들이 나라를 위험하게 만들어 자유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한 방법이라고 한다. 그의 투명한 확신은 나의 의사로서의 사명감을 그리고 우리나라를 점차 위험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 불안감이 들더라도 이것을 무시하지 않고 계속 나는 여러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정의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끊임 없이 고민하겠다. 소통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마 나는 내가 꿈꾸던 성형외과 전문의가 되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옳은 길로 나아가는 것은 포기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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