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를 읽고
올해 2월 병원에 사직서를 제출하면서 부터 나의 고민은 '과연 이것이 옳은 일인가?' 라는 생각이었다. 의대 2천명 증원이라는 사안을 두고 반대하는 입장을 꼭 '사직'으로 표현해야 하는가 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교수님들도 나가는 '명분'이 있는가에 대해 물어보셨고, 나는 부당한 전공의 생활을 개선시키기 위해서 라는 답변을 드렸지만, 결국 사직의 원인인 증원과는 조금 다른 이유처럼 보였다. 기성세대는 뉴스나 여러 매체를 통해 그래도 환자 곁을 떠나면 안된다는 이야기를 했고, 그 점에 대해서는 나 또한 죄책감을 갖고 있었기에 지속된 고민이 있었다.
하지만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그 이유로 제시한다던가, 정부의 '업무개시명령'이나 '사직서 수리 금지 조치' 등의 행위는 현 상황에 대한 나의 반발심을 더 크게 만들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읽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의료 행위를 통해 'Do no harm', 즉 환자에게 해가 되는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을 굉장히 강조한 서문이다. 환자를 떠나는 것 자체가 해가 되지 않느냐 라고 하면 일단 당시에는 전공의가 병원을 떠난 다고 해서 교수님들까지 떠나는 상황은 아니기에 필수적인 진료는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의대 증원 이후 발생할 의료지출이나 건보료 증가로 필수의료에 할당되는 재정이 더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로 인한 악영향이 오히려 환자에게 해를 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업무개시명령이나 사직서 수리 금지 조치들은 의사를, 특히 전공의들을 노동자 개인으로도 생각하지 않은 것이라고 보여 부당하다는 생각이 더 증폭되었다. 이미 살인적인 스케줄 속에서 교수, 선임 전공의, 환자, 간호사들에게 많은 압박을 받으며 인간 이하의 삶을 살고 있었는데, 병원을 그만두지도 새로운 곳에 취업하지도 못하게 하는 조치가 개인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병원 내의 부속품으로만 취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감정적인 부당함이 나의 행동에 대해 어느 정도 합리화를 하게 만들었다. 이후, 근무를 중단하고 꽤 오랜 시간은 병원에서 떨어져 그동안 잃어 버린 나 자신이라는 개인을 찾는 시간을 가졌다. 오래 전부터 의지를 해온 신앙이나 책을 통해 많은 성찰을 해나갈 수 있었고, 특히 다른 병원에 취직하여 재정적인 고민이 해결되면서 더 편한 마음으로 책 뿐만 아니라 강의나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 현 상황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고민들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오랜만에 고등학교 시절 양서과목에서 유일하게 구매하지 않았던 책인 '양자역학'을 발전시킨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자서전인 '부분과 전체'를 읽게 되었다. 나는 물리를 좋아하고자 했지만 물리 성적은 나를 좋아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결국 수능 과학 선택 시에는 물리를 아예 배제하였던 아픈 기억이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양자역학의 발전 과정만을 다룬 책은 아니었고, 제 2차 세계 대전에 휩쓸리며 여러 윤리적인 문제에 봉착하게 된 과학자의 철학적인 고민을 깊게 나눈 책이었다. 물리적인 부분에 대한 설명은 고등학교 이후에는 전혀 접근하지 않았던 분야라 이해하는데 꽤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의 인간적인 고뇌에 담긴 성찰은 여러 부분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특히 하이젠베르크가 전쟁 시 패할 것이 자명한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떠날 것인지, 아니면 독일에 남을 것인지 고민하며 우리에게는 ’플랑크 상수‘로도 널리 알려진 막스 플랑크와의 대담 부분이 굉장이 인상 깊었다.
“독일이 처한 끔찍한 상황에서는 아무도 더 이상 올바르게 행동할 수 없네. 어떤 결정을 해도 불의에 가담하게 되는 셈이지. 결국 스스로 선택해야 해. 파국이 종결될 때까지는 많은 불행이 있을 것이고, 그런 불행을 막을 수 있다는 희망같은 것은 버려야 한다는 것 뿐이네.”
병원에 돌아간다면 예상되는 앞으로의 상황들이, 특히 한 사람의 환자로서 불안해 질 수도 있는 이 나라의 미래가 한 쪽에 선명하게 보이면서도, 지금 이 순간만 눈 딱감고 나만 살아 남자고 생각한다면 성형외과 전문의로서 편하게 지낼 수 있는 나의 미래가 그려지면서 반대편의 미래를 외면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어떤 선택도 의로운 선택은 없고, 결국 내가 어떤 의미 부여를 하는지에 따라서 조금 더 나은 선택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마음에 걸리는 것은 나의 양심인 것이다. ‘지역 불평등’으로 초래된 응급실 뺑뺑이 사건, ‘의사 소송시 발생한 비합리적인 판결‘들로 인한 필수과 기피, 작금의 문제가 부족한 의사 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 원인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의대 증원 수가 정확한 분석이나 추후 수업을 위한 올바른 대비 없이 이뤄진 결과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전공의들은 여러 갈림길에 놓여있다. 정부나 병원은 전공의들의 3월 복귀를 예상하고 있다. 내가 많은 표본을 조사한 것은 아니기에 다수의 의견은 어떨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직까지 내 주변에는 대학병원 복귀 보다는 대세를 따르고자 하는 친구들이 많으며, 전공의 과정을 포기하고 군복무를 겸허히 기다리는 친구들도 있다.
고민을 거듭할수록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선택은 없다는 것을 느끼고 내가 이미 결정해 버린 사직이라는 선택으로 인해 합리화를 위해 내 주장에 대한 확증편향을 가지게 되버린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될 때가 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때도 그랬고, 그외의 모든 사회적 문제들은 옳음에 대한 가치 판단 위에서 사회적 흐름에 따라 바뀌어 갔다. 물론 그 사이 퇴행의 과정도 있었고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이런 시간일수록 내부의 다름을 인정하고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결말이든, 전공의를 포기한다도 하더라도,우리는 결국 환자들을 치료하며 살아갈 사람들이다. 전문의가 많아 각 과마다 철저히 분업화가 된 우리나라 의료는 타과의 전문성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대학병원에 돌아가게 되든, 돌아가지 않든 추후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를 도와 일하게 될 사람들이기에 우리는 지금 각 사람의 상황을 이해하고 대화해 나갈 필요가 있다. 각 과마다, 년차마다, 현재의 상황에 따라 선택은 달라지겠지만 그것을 비난하고 원망하기 보다 각자의 상황을 공유하고 이해 받을 수 있는 그런 단체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