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만이었다.
어디선가 이별을 묻히고 와서는 내게 닦아달라던 당신이 있었다. 어린아이가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천진하게 웃는 것마냥 나를 재회하더니 자꾸만 쓸쓸함을 흘려댔다. 수저를 들 때마다 나는 어쩐지 당신이 먹는 것이(혹은 핥는 것이) 흉터인 것만 같았고, 이따금 술잔을 부딪칠 때면 그것이 퍽 버거워 보여 당신이 깨지지 않도록 손아귀의 힘을 빼야만 했다.
어느 못 된 사람이었을까, 어느 모진 계절이었을까. 상처로 남지 않으면 맺을 수 없는 관계였는지. 한때는 당신이 내게 그런 겨울이었는데, 당신이 나간 자리 다른 이들이 드나들며 그 시퍼런 기억들까지 같이 가져가 버렸나 보다. 다시, 당신이 잠든 뒤에야 침대에 눕는 습관을 들였다.
늦은 밤, "뭐해"라고 물어온 당신의 문자 메시지.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단숨에 찾아가 답장 대신 얼굴을 들이밀었다. 놀란 표정 앞에 늘어놓은 어쭙잖은 변명은 고작, 응원하는 축구팀이 경기에 져 단지 드라이브가 하고 싶었다는 것. 이유 따위 아무래도 괜찮았으니까. 내 오래된 기억 속 당신은, 그 시간쯤엔 한참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사람. 쉽게 쓰고 보낸 문자가 아닐까봐서 나는 결코 당신에게 향했어야만 했다. 그런 밤에 당신이 혼자 깨어있는 것이 싫었고, 그런 밤에 당신을 혼자 두는 것이 불편했다. 두 번 세 번 같은 순간이 찾아온들 그 길을 외면하진 못했으리라.
그리운 것이 나인지 그인지 몰랐을 당신, 당신의 그리운 이가 내가 아니어도 괜찮았던 나. 그저 내가 마련할 수 있는 마음은 당신이 혼자를 자처하는 시간 속에서 혼자 남겨지진 않도록 뒤를 따르는 일. 함께 밤 짙은 곳까지 걷기로 하곤 무작정 길을 나섰다. 자정이 넘어 도착한 남산의 산책로엔 여름색 진하게 묻은 풀벌레 소리가 가득했고, 적당한 소음은 밤이 지닌 고요를 더욱 깊게 만들었다. 나는 그저 나직하게 당신의 뒤를 밟았고, 어둠 속에서도 검게 도드라진 당신의 그림자 때문에 가슴이 저려 한 두 번 걸음을 멈추기도 했었더랬다. 얼마쯤 걸었을까, 얼마쯤 깊어졌을까, 보고 싶었냐는 물음엔 여름이 그리웠다 답했고, 어떤 시절을 보냈냐는 질문엔 바람에 흔들리다 가끔은 부러졌었다고 전했다.
추웠던 여름을 따땃하게 덥히고 싶던 몇 번의 낮과 밤이 지나 당신이 온전히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보니, 그제야 나는 내 숨이 옅어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가슴께의 묵직한 통증이 다시 꿈틀거리는 것이 퍽 싫지 않았고, 잠시 꺼내 본 감정을 응시하다 그만, 후회도 조금은 삼켰더랬다. 그 어떤 예방과 처방을 내린들 무엇이 달라졌을까. 감히 피하거나 정할 수 없는 바람이었거늘. 수년 전 우리가 엮였던 사달은 어쩌면 그 시절의 뜨거움보단 '오늘의 당신'을 덥히기 위한 인연이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안도. 내 못난 흉터들이 도리어 뿌듯한 계절이었다.
당신이 다시 본래의 자리로 떠나야 했을 무렵, 낮게 머문 당신의 시선 그 아래로 떨어지는 것들을 바라보았다. 몇 번쯤 눈가를 훔치더니 고맙다 마음을 전해왔고, 그 말로부터 조금 거리를 둔 시간에 이르러 '어떻게 할 것인지'('어떻게 살 것인지'였을 수도)를 물어왔다. '무엇을'이라는 단어가 결여된 그 문장을 향해 나는,
곧 가을이 오니, 다시 먹먹해지기로 했다고 전했다.
[사진 : 파리, 프랑스 / 베를린, 독일 / 자그레브, 크로아티아 / 제주, 대한민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