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울고있는땅콩 Jan 16. 2021

단골 가게, 그리고 남겨지는 것들

 단골 가게를 만들려는 의도가 먼저였을까, 익숙한 장소를 편애하는 것이 먼저였을까. 낯이 익을 대로 익은 단골 가게를, 그럴 장소를 찾아내는 일을 좋아해. 아니, 몹시 아껴.

 저마다의 기준이 있겠지만 나의 단골 가게는 이래. 유명하거나 숨겨진 맛집이 아니어도 괜찮고, 훌륭한 가성비를 지니고 있지 않아도 돼. 가게 사장님과의 관계가 반드시 돈독해야 할 필요도 없어. 사람에게 빠질 때처럼 마음을 사로잡을 무엇 하나만 있으면 충분한 거야. 가구에서 풍기는 편백나무향, 유달리 환한 백열등의 밝기, 1년 내내 한결같이 덜 익은 상태로 나오는 국적 미상의 김치 같은 것들 말이야. 필요한 조건이라고 하면 그저 끌림. 애당초 누군가에게 추천이나 소개를 할 목적이 아니니까, 그저 끌리는 대로 내 마음만 보내면 되는 거야.

 그래서 이따금, 데리고 가는 사람들에게 가게를 해명하느라 애를 먹기도 했었어. 한 후배는 이런 곳을 왜 단골 삼아 다니냐며 이해 못할 연애를 하는 사람 같다고 농을 치기도 했는데, 왜 있잖아 남들 보기엔 연애를 하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커플. 그런 사이 같다고 하더라고. 그래도 가게와 연애를 하는 사람이라는 표현, 썩 싫지만은 않았어. 사실은 퍽 끌렸어.


새로운 단골 가게를 발견하는 것은
그 평수만큼의 새로운 추억을 담을 서랍을 마련하는 일이야.


 특별한 사람과 함께 해서 평범한 장소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보통이라면, 장소를 먼저 마련해두고 소중한 사람을 데려가는 것은 나만의 유별난 습관. 단골로 삼고 싶은 가게를 찾으면, 또 한 번 추억을 지을 밥솥을 발견한 것만 같았어. 아끼는 사람 혹은 아끼고 싶은 사람을 이끌어 한끼 밥이나 한잔 술을 나누며 한바탕 웃고 우는 이야기들을 담는 그릇이랄까. 그곳에서 잔뜩 뜸을 들여가며 서로의 나이테를 들여다볼 사건을 만들고 싶은 거야. 대학 초년생의 풋풋한 기억들이 담긴 생선구이집, 함께 넘어지던 청춘의 냄새를 묻혀놓은 닭볶음탕집, 아주아주 깊은 속을 열어 보일 때만 찾아가던 LP바들이 그런 곳들이었어. 아, 가끔은 새로 찾은 가게를 꼭꼭 숨겨두고 한참을 아껴 놓기도 해. 데려가고 싶은 사람이 생길 때까지 말이야.



 한 사람과 연을 트는 것이 또 한 번의 상처까지 각오하는 일이듯 한 가게를 단골로 부르는 일도 그와 같다는 걸, 언제 알게 되었을까. 많은 기억들을 넣어둔 가게가 더 이상 영업을 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꽤 오래 마음을 훔쳐내린 것 같아. 사람과 추억과 시절을 빼곡히 담아둔 금고가 있었는데 어느 날 그만, 은행이 파산하고 그것들 모두가 증발되어버린 거야. 차마 어디 가서 토로하기엔 쑥스럽고 과장된 슬픔인 것만 같아 홀로 외진 곳에 이르러 앓고 싶은 만큼 앓고 왔었더랬지.

 가게가 나를 떠났던 것만은 아냐, 내가 가게를 떠난 적도 있었으니까.  사람만을 담고 싶었던 술집이 있었어. 복고 열풍이 불기 한참 전에 이미 90년대 풍으로다가 가게를 꾸며 놓고 모둠전이랑 김치찌개 같은 것을 팔던 곳이었지. 그런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어쩐지 그 가게는 우리가 머문 '시절'을 진공 포장으로 고스란히 보관해주는 공간 같았어. 여럿이 어울리던 자리에서  사람을 처음 발견하고 우연처럼 인연의 마음을 던져버린 장소. 충분히 넉넉한 서랍이   있는 가게였지만 그곳만큼은  사람만으로 채우고 싶었어. 첫만남을 담은 가게에 다른 기억을 넣는 것이 괜히 오염이나 희석처럼 느껴져서  사람만 소중히 담고 싶었던 거야. 잔뜩 사랑했고, 잔뜩 채워넣었었지. 꽉꽉 채워넣어도 여전히 여유가 있어 더 각별했던 가게였어. 어쩌면 그 여백이 우리 사이의 채울 수 없는 공백 같은 것이었을까,  번의 환절기를 보내고,  계절을 여러번 맞이할만큼 시간이 지났을 때 그이는 결국  곁을 떠나게 되었고, 나는  이상  술집엘 가지 않게 됐어. 친한 사람들 여럿과 다시 다녀도 좋을 괜찮은 가게인데,   제대로 열어보지도 못했던  서랍에 너무 많은 것들을 넣어두었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될까 봐서. 깊이 넣어둔 기억을 딛다 발이 빠져  밑으로  하고 꺼질까 봐서.  앞을 지날 때면 자꾸만 굳게 닫힌 문이 나를 꾸짖는 것만 같아 결국, 내가 떠나버린 술집.


익숙하다고 이별이 담담하진 않았어. 내가 떠났다고 마음이 단단하지도 않았어.


 부디 세상의 수많은 서랍들이 오래오래 남겨지는 것들로 남겨지길 바라. 나도 가게도 그리고 사람들도, 보고 싶은 것들 모두 보고 살면 좋겠어. 우리가 함께 살았다는 것을 기억해주기 위해서. 먼 날 혼자가 되더라도 떠먹을 추억 한술 정도는 소복이 남아있게 말이야.


 오늘은 오랜만에 단골 가게에 가서 저녁을 먹으려고.





[사진 : 그렌델발트, 스위스 / 체스키 크롬로프, 체코 / 서울, 대한민국 / 제주, 대한민국]

매거진의 이전글 그리움의 온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