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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고있는땅콩 Jan 26. 2021

책이 멸종되는 시대의 사적 기록

1.

 어렸을 적, 그러니까 초등학교를 막 입학했을 때쯤의 기억. 어머니는 여느 부모님들처럼 밤 10시가 되면 이제 그만 잘 시간이라고 나를 방으로 들여보내곤 하셨다. 특이점이라면 10시가 넘더라도 침대에 누워 책을 읽는 것엔 관대하셨는데, 잠을 자기 싫은 어린 마음에 독서를 시작했었다. 나중엔 그게 습관이 돼서 책 없이 잠드는 밤이 어색할 따름이었지. 물론 지금은 책을 읽다 잠드는 밤이 더 낯설지만, 아무튼. 머리맡에 항상 책을 쌓아두는 풍경은 그 무렵부터 꾸려져 왔다.


2.

 책을 사 모으는 취미가 있다. 남들은 옷이나 가방, 전자기기 등을 사며 소비의 쾌감을 느낀다고 하는데 내겐 특히 책이 그랬다. 서점에 가 새로 나온 소설이나 수필을 뒤적이는 일은 저녁 메뉴를 고르는 것 같았다. 일상적이지만서도 적당한 신중을 기해야 하는 선택. 이미 유명한 작가나 작품도 좋지만 때로는 한두 꼭지나 한두 문장에 끌려 새로운 음식점의 첫 문을 열 듯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책을 집어 들기도 했다. 무엇이든, 책을 사고 나면 '읽을 것'을 쟁여두었다는 생각에 괜히 뿌듯해져 서점을 나오는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마음이 부르고 그랬다.


3.

 아직도 책은 종이로 인쇄된 활자로 봐야 한다는 구닥다리 생각을 갖고 있다. 책장이 넘어갈 때 사각거리는 소리와 손 끝에 느껴지는 종이의 감촉, 책 표지를 보며 한 번씩 쓰다듬는 그 행위가 좋아서 말이지. 하나 더, 책은 꼭 사서 봐야 한다는 고집도 있네.


4.

 가족이 줄어들면서 남는 방을 서재로 만들었다. 4단 책장 네 개를 들여놓고 어머니와 칸칸이 나눠 썼는데, 열 다섯 살인 그쯤엔 내 책으로 한 개 정도를 채웠었다. 스물서넛 언저리엔 두 개를 넘어설 만큼 내 책이 많아졌는데, 그게 왜 그렇게 뿌듯했던 건지 보고 있으면 괜히 대단한 성취를 이룬 것 같은 마음이 들었더랬다. 책장이 꽉 들어차서 이중삼중 책이 누워가며 쌓이는 그 모습을 그렇게나 좋아했지.

 나중에 내게도 아이가 생긴다면 이런 마음도 닮게 되려나. 어머니가 내게 해주셨듯이 책만큼은 아끼지 않고 사줄 거라고 미리 약속할게. 아, 책장도.


5.

 내 여행짐을 본 사람들은 늘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무슨 옷만큼이나 책을 싸들고 다녀?". 2일에 1권 꼴로 여행 기간을 셈하여 책을 싸갔으니 보통 사람의 양보단 꽤나 비대하게 보였을 것이다. 여행을 같이 갔던 지인은 '책을 읽으러 여행을 온 사람' 같다며, 그럴 바에 뭐하러 큰돈을 들여 멀리 떠나는 것이냐고 나를 놀리기도 했었다. 햇볕의 높이가 다르고, 공기의 무게가 다르고, 사람 냄새도 다르니까 그래서 달이나 별이 조금 더 반짝인다고 느껴지는 곳이 여행지니까. 읽는 글자 하나하나의 감촉이 달라지고, 문장이 뿜어내는 풍경이 더욱 짙어지니 이미 중독된 그 맛을 어찌 외면할 수 있을까.

 홀로 길을 나서도 책이 있으면, 혼자도 충분히 괜찮았다.

 물론 가져간 책을 다 읽고 온 여행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난 그 정도로 계획적인 사람은 못 되니까.



6.

 소중한 사람들에게 이따금 책을 선물했다. 표지 뒤 공지空紙에는 꼭 손편지를 적어주었는데, 전해줄 땐 괜스레 부끄럼이 올라와 "서점 들렀다 그냥 샀어", "원래 책 선물 다른 사람들한테도 자주 줘"와 같은 허튼소리를 하며 붉게 오를 얼굴을 미리 감추었다. 사실 당신에게 주려고 서점을 찾아가 한참을 고민하고 고른 건데 말이야. 앞장에 적은 글귀는 몇 번이나 고쳐 쓰고 옮겨 적다 글씨가 너무 못생겨질까 봐 붓글씨를 써 내려가듯 신경을 써놓고 말이야.


7.

 사다 놓기만 하고 읽진 않아서 책이 점점 쌓여갈 때가 있다. 일상이 바쁘거나 사람에 취해 책을 좀 멀리하거나 그냥 흥이 떨어져 책장이 잘 넘겨지지 않을 때. '읽을 것'이 넉넉하다는 것에 마음이 놓이기도 했으나, '읽지 않은 것'이 많아졌다는 것에 괜한 부채 의식이 쌓이기도 했었다.

 지금 내 머리맡엔 읽고 있는 책 1권, 읽다 지친 책 2권, 읽고 싶어 사들고 온 책 2권 그리고 다 읽은 책 1권이 있다. 그 모양새를 보고 있으니 한편으로 사람 풍경을 보는 것 같았다. 곁에 있는 사람, 멀어져 버린 사람, 마음이 가는 사람 그리고 서로가 상처로 남은 사람.


8.

 어떤 이에게 주고 싶어 사둔 책이 있었는데, 끝내 건네지 못한 책이 있다. 치열한 사랑 때문이었을까, 우리에겐 여유가 없었다. 한가롭게 책을 읽으며 마음이나 생각이 제멋대로 엉키도록 내버려 두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렇게 우리가 여유롭게 섞이는 시간을 보냈더라면, 서로를 향한 마음이 조금은 덜 날카로웠을텐데. 

 전해주지 못한 책을 보고 있으면, 전해주지 못한 마음들이 저 책으로 남아버린 것만 같아 기억에서 자꾸 씁쓸한 맛이 난다.


9.

 지인이 책을 출간했다. 두껍고, 읽기 어렵고, 표지 디자인이나 내부 구성도 취향과는 어긋났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낯선 책이니까. 낯선 시간일 테니까. 그렇게 나도 덕분에 좀 낯설어진 사람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10.

 책을 읽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든다고 한다. 상징과도 같았던 유명 서점은 영업을 종료했고, '독서'라는 단어는 흔하게 보고 듣기가 어려워졌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쉽게 목격되던 '책 읽는 사람들'은 오늘날 멸종에 다다르고 있다. 문득 내가 보호종 같다는 생각이 든다. 누가 보호를 해주는 건 아니지만, 개체수가 확 줄어버린 종자가 된 것만 같다. 그래도 난 책에 여전히 끌린다. 책, 서점, 독서, 서가, 서재 따위의 단어들을 입에 올리는 것이 달큼하다. 종이에 새겨진 글씨에 빠져 시공간을 잠시 마취하는 그 감각이 여전히, 몹시도 좋다.





[사진 : 파리, 프랑스 / 자다르, 크로아티아 / 파리,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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